"임금이 바로 서야"
호통친 기개가 얼굴 위에
철면피(鐵面皮)가 아니라면 얼굴은 정직하다. 표정은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전한다. 옛사람의 말이 "나무의 나이는 나이테에 묻고, 사람의 이력은 얼굴에 물어라"고 했다. 얼굴이 그 사람의 자서전인 셈이다. '눈썹 끝이 말려들면 다복(多福), 팔자 주름이 입아귀로 가면 아사(餓死)' 하는 따위의 속설까지 믿는 것은 섣부르지만, 얼굴로 생애를 가늠해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흥미롭다.
'송시열 초상' - 김창업 그림, 비단에 채색, 91×62㎝, 1680년, 충북 제천 황강영당 소장. 조선 중기의 대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초상이다. 이토록 극적인 인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얼굴에 산맥이 보인다. 이마를 가르는 주름은 첩첩 연봉이고, 눈썹과 광대뼈에 비낀 주름은 골 깊은 험산이다. 10년이 채 안 되는 벼슬살이에 나라 정사(政事)를 쥐락펴락했던 우암이다. 낙향과 등용과 유배를 거듭하다 사약을 마신 삶에서 무슨 평탄한 흔적을 찾겠는가. 응시하는 눈초리가 냉랭하고, 눈머리와 눈초리는 불그레하다. 저 눈빛으로 "임금이 발라야 나라가 바르다"고 외쳤다.
우암의 나이, 이때가 74세다. 올 굵은 눈썹이 튀어나오고 수염은 물결치는데, 대춧빛 강건한 입술은 꾹 다물었다. '송자(宋子)'라는 존칭으로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고도 강고한 성격 때문에 비난을 받은 그는 불화(不和)를 구태여 조정하려 들지 않았다. 납덩이 같은 외고집이었다. 우암은 관복(官服)을 입은 초상화가 없다. 모두 유학자의 옷차림인 심의(深衣) 바람이다. 비단옷을 멀리한 그의 성품이 개결했다. 그림은 문인(門人)이자 후학(後學)인 김창업이 그렸다. 얼굴은 마음을 닮는다. 우암 얼굴에 생애의 풍상(風霜)이 완연하다. /손철주: 미술 평론가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