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 초상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여자 주인공은 숫자로 따져 초라하다. 사대부 집안 여인이나 여염집 아내, 그리고 기생까지 포함해 알려진 작품 수가 10점이 안 된다. 왕실도 다르지 않다. 조선 초기에 왕비 초상이 그려진 사실이 있지만 임란 이후는 그런 기록조차 없다. 왕후의 초상을 그리느냐 마느냐를 놓고 대신들이 티격태격했을 정도니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유습이 얼마나 드셌는지 짐작이 간다. 하여튼 여인 초상은 드물고 귀하다.
이 작품은 놀랍다. 초상화의 전형성을 이처럼 고루 갖춘 여인상이 없기에 그렇다. 떡하니 버티고 앉거나 차려입은 품새가 여느 사대부 초상의 격식이 부럽지 않다. 상대를 살짝 내리깔고 보는 눈매에서 그녀의 품성과 지위가 만만찮음을 알겠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꾸밈새에서 신분을 얼추 따져볼 수 있겠다. 여인은 예복(禮服) 차림이다. 패물로 주렁주렁 장식한 저 쓰개는 화관(花冠)이다. 화관은 조선 후기에 궁중이나 사대부가(家) 여인들이 쓰다가 뒷날 서민도 혼례 때 착용했다. 쪽 찐 머리를 가로지른 비녀는 용잠(龍簪)이다. 용무늬를 새긴 비녀는 애초 왕족의 장신구였다.
여인은 겉에 초록색 원삼을 걸쳤다. 넓은 소매에 색동이 지나가도 활옷과 달리 장식이 유난하지 않다. 속저고리 위에 덧저고리가 보이고 매듭을 지은 고름은 널찍하게 드리웠다. 남빛 치마 아래 맵시 나는 신발은 코 끝에 당초무늬를 새긴 갖신이다. 화문석 위에 자리 잡은 의자는 19세기에 수입된 중국제다.
여인의 신상(身上)을 추정할 수 있을까. 고종 뒤에서 수렴청정한 신정왕후 조대비(趙大妃)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런데 대비나 왕후의 예장(禮裝)치고는 좀 간소하다. 주름이 잡혀도 얼굴선은 곱상한데 용모에서 풍기는 기세가 범상치 않다. '로열패밀리'다운 과묵함도 맘에 든다. 입을 얼마나 야무지게 오므렸는가. /손철주 미술평론가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