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를 타고 '양양'으로 가노라면 ‘장전’항이 턱밑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복 주머니 같기도 하고, 항아리 같기도 한 이 항구의 규모는 작지만 인근에는 이런 천혜의 항구가 없다.
억지로 인공방파제를 만들어서 파도가 밀려오면 떠밀려 뒤로 넘어질 것같이 허전하고 바다의 한가운데 들어가 있는 것 같은, 다른 항구에 비해서 이 항구는 양팔을 펴서 안은 것 같이 항구의 아가리까지 아담하게 솔 덮인 산으로 둘러쳐져서 바다 속에 항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지 속에 바다를 끌어들인 것처럼 편안하고 정겹다. 요새(要塞)같이 감추어져서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등대가 없다면 항구를 알아볼 수 없을, 천연의 양항이다. 규모가 작은 것이 아쉽다.
장전항은 인근의 천하명산 금강산을 뒤로하여 예로부터 배 길이나 '신작로'나 '철길'로 해서 많은 외지인들을 끌어들인 곳이기도 하지만 일제 때엔 정어리 고장으로 더 이름이 났던 어항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금은 북한 땅을 밟을 수 있는 유일한 합법통로인 '장전'항구의 외항을 그리면서, 떠나온 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으로 돌아가 버린 옛날의 필름을 되감아서 잠시 나들이한다.
엿 방 집 ‘바우’가 어느 날 새까만 교복에다 금빛도 찬란한 중(中)자 모표를 달고 신작로 한가운데를 유유히 걸어올라 오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서 숨어버렸다.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맞대면을 할 수가 없었다. 공부는 그보다 못하지 않았는데도 못 다니는 이유를 굳이 설명해야하는 구차함이 싫었던 것이다. 선망(羨望), 이것이 바로 여기 딱 들어맞는 내 심경이었기에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집안일을 홀로 곱씹고 또 하늘을 보았다. 내년에는 조금 낳아질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영영 못 만날 친구 같기도 했다.
그 한해의 생활은 그와 내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고 그 후 그는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으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 탓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그의 교복과 모표가 금강중학교 것이고 그 금강중학교가 장전에 있었다. 일제말기에 생긴 중학교이기에 오 년제였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편제가 달라졌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래서, 몽매에도 그리는 고향산천이건만 갈 마음은 선뜻 내키지 않는다. 그것은 아픈 상처와 함께 깊이깊이 새기고 아물지 않는 장전이기도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해만 더 기다려 보자. 그리고 그때에 내가 농사꾼이 돼서 가문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배워서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하는지를 생각하기로 하고 일 년간을 삶의 시험장으로 삼기로 했다.
소원대로 일 년 후에 진학할 수는 있었지만 그 학교는 아니었다. 그래서 또 ‘바우’와 만날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는 나와 이렇게 헤어지도록 운명적으로 계획됐고 그대로 진행됐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몫의 시간이 다 지나간 지금쯤에서야 감히 말할 수 있지 않나싶다. 다시 짜고 싶은 판이다. 짠다면 이번에는 내가 주도하고 싶지만 이는 한계를 잊고 허풍 치는 공허한 망상이다.
‘바우야 여우야 날 잡아라’ 뚱뚱한 그를 놀리고 운동장을 뛸라치면 조금 따라오다가 곧 포기하고 마는 우량(?)아이기에 우리가 그를 놀릴 수 있었지만 그를 정면으로 대하지 못했던 그의 어른스런 걸음에 기죽었든 지난날이 잠깐 스쳐지나간다.
어디 있는지, 한번 만났으면 정말 좋겠다./외통-
-창조는 고민 속에서 나오고 발전은 고생 속에서 움튼다.-밝은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