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신작로 위에 자갈이 부서져서 빽빽이 박혀 하얗게 다져있다. 더는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다니던 몇 개의 돌이 잘 다져진 신작로 바닥에서 걸음마다 채이며 밉상을 부릴 것 같다.
십 리나 되는 먼 곳 ‘벽양’ 간이역에서 떠나 내려오는 ‘양양’행 기차가 막 ‘신흥천’ 모롱이를 돌았는지, 기적소리가 바람을 타고 엷게 펴진다. 거리의 양쪽에 흐르는 도랑 물소리가 기적소리에 잠깐 잦아들다 다시 재잘거리며 흐른다. 맑고 깨끗한 물은 잘 다듬어진 돌을 깔고 쌓은 도랑을 따라 부지런히 들판을 향해서 재잘거리며 흐른다. 머물러 주저하지 않고 정해진 갈 곳, 봇도랑을 향해서 소리 내어 달려간다. 물 흐름이 빠르니 물밑은 더욱 깨끗하여 바닥 모래 구르는 소리조차 들린다. 한길 가 도랑 옆집 사람들은 밤이면 하늘에 흐르는 별똥을 보며,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저들 삶의 터전을 작은 손바닥으로 어루만지고 흐뭇해 할 것이다.
복 받은 사람들이어라.
밤톨 같은 돌이 이따금 지나가는 동네 소달구지 바퀴 쇠테에 깔려서 재깍거릴 때, 소리는 손 씻는 물가 소년의 귀에 박혀서 소년의 이마가 찡그러진다. 한적한 마을은 한낮인데도 인적이 드물어 고요하다.
소년의 일과는 방과 후와 이곳에서 먼저 손발을 씻는 일이었다. 물은 알맞게 시리다. 행여 지나가는 달구지 바퀴에 튀긴 돌이 얼굴에 맞을세라 두 손을 물에 넣은 채로 올려보는 소년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달구지가 지나가는 조금 아래의 건너편에서 단발머리의 여학생이 달구지의 걸음에 맞추어 지나간다. 워낙 사람이 드문 곳이어서 지나가는 사람은 무대 위를 걷듯이 조심하지만 유다르게 이 여학생은 달구지를 방패 삼아 걸어간다.
이것이 소년을 의심케 한다. 차츰 윤곽이 드러나면서 소년의 손과 팔은 굳어졌고 소년의 눈은 그 여학생의 목덜미에 붙박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여학생의 목에 맨 스카프에 매달려서 서서히 끌려갈 따름이다. 훤칠한 키에 희고 해맑은 눈,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같이 보였다. 여학생은 고개를 조금은 숙이고, 애써서 외면하지 않는 척함을 감지되면서 소년은 더욱 황홀하다. 달구지가 두 집쯤 지나서 올라갔을 때 여학생은 재빨리 걷든 길을 바꾸어서 달구지와 점점 거리를 두고 길 복판으로 옮기며 고개를 들고 활보한다. 여학생은 쏜살같이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소년의 손은 물속에 들어가질 못했다. 달구지는 여전히 한길을 따라서 작아지고 여학생도 사라졌다.
텅 빈 신작로엔 소슬바람이 일어 신작로 한가운데의 흰 먼지를 하늘로 날려 보냈다. 여학생은 넓은 외길인 이 신작로를 따라 올라가지 않으면 그녀가 머물러 있는 집, 솔밭 밑 형부네 집에 다다르질 못하고 이 길을 걸어가자니 남학생 선배의 집 앞을 외면할 수가 없는, 외통길인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고 자기를 바라보는 선배 남학생의 눈길을 받으면서도 이 길을 꼬박꼬박 걸어 올라간다. 그 여학생은 어쩌면 일부러 학교의 일거리를 스스로 떠맡고서 일부러 늦게, 홀로 이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소년은 도랑 가에서 손을 씻고 여학생은 드넓은 길을 무슨 방패든지 방팰 만들어 걷곤 한다. 그 방패가 어린이일 때도 있고 할머니일 때도 있고 지게를 진 아저씨일 때도 있다. 오늘은 만군을 거느린 호위병 달구지를 의지하고 소년의 눈 화살을 피해서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형부네 집에 들어갔다.
소년은 후배 여학생의 길가는 자태에 매료되어 거의 상습적으로 길가의 도랑 가에서 손을 씻었다. 그러나 둘은 눈길도 말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소년이 졸업하고 다른 곳의 상급학교에 진학함으로써 여학생은 아무런 느낌도 얻을 수 없이 넓은 신작로를 활보하고 다녔을 것이다. 어쩌면 소년의 일방적인 생각이었고 방패의 달구지나 호신의 동행, 어린이나 농군은 우연의 일치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직 당사자만이 알고 그때 흘렀든 물길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그 도랑물은 이미 흘러갔고 그 당사자는 어디에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말이 있을 수 없다.
소년은 그 청초한 여학생의 자태를 잊지 못하고 가슴 깊이 간직하며 살아왔다. 각각의 호흡이 새파랗고 야들야들한 새순의 세상 숨결이고 눈 속에 흐르는 물기는 아무도 모르게 숨어 깜박이는 별빛을 받아들이는 호수였다.
지구상 어느 곳보다도 먼 곳이 동해안 휴전선 남쪽과 북쪽의 거리다. 이제 소년은 동해안 휴전선 북쪽에서 손을 내밀면 맞잡을 성싶은 거리의 공간을 멀고도 험한 길을 돌고 돌아서, 남들이 부여받은 생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이의 긴 시간을 좌절과 재기를 반복하여 여기 와 있다.
환갑이 다된 늙은 소년은 기대와 흥분 속에 꿈속 여학생의 얼굴을 그리며 서성인다. 나와 있는 많은 그 지역 고향 사람들을 일일이 훑어보았으나 비슷한 이는 어딜 둘러봐도 없었다. 바쁜 일상의 일정 속에서도 오늘은 기어이 만나보려고 마음 다지고 왔건만, 나타나지 않으니 허전하고 야속했다. 오늘도 예고 없이 나만 일방적으로 나왔으니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오기 전에 몇 번이고 향우들에게 다지고 다져 알았으니 만나리라는 기대는 당연한데도, 일러준 고향 선배들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내가 보고 느낀 그 아름다운 용모와 근사한 이를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위령탑의 참배 행사가 진행되고, 면면촌촌이 갈라 앉아서 서로 인사를 하는데도 여전히, 그 아름다운 용모와 근사한 이는 나타나질 않는다. 소년 늙은이는 초조하고 다급했다. 그리하여 그쪽의 원로에게 가까이 가서 물었다. ‘음악 선생의 처제’ 아무개는 왜 안 나오느냐고 귀에다 대고 ‘동창생인데 만나’ 봐야 하노라고 했다. 소년 늙은이는 흥분해 있었다. 옛말 그대로 몽매(夢寐)의 상 아무개를 못 만나보고 돌아가는 판국이 된 것 같아 안절부절못한다. 음식은 그 지역 분들이 팀을 짜서 장만했다며 모두 분주히 나르고, 앉은 참배객의 입은 방아 찧기 시작했다.
‘왜? 여기 와 있는데!’ 하며 손잡아 끌어내 내 앞에 서게 했다. 그녀는 이미 여기 와 있었고 내가 못 알아봤을 뿐이다.
손을 잡고 내가 아무개며 어디에 집이 있고 같은 학교 다녔고 그대는 소나무밭에 있는 형부의 집에서 학교 다니면서 매일 어느 길로 언제쯤 집으로 올라갔고, 하는 것을 묻지도 않는데 늘어놓으며 손을 잡고 있다. 할머니가 된 소녀의 손마디는 굵었고 바닥은 두껍기만 하다. 그 얼굴이 아닌 딴사람의 탈을 쓴 것만 같다.
이럴 수가! 여러 방법으로 확인했음에도 틀림은 없었다. 그들의 여형제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고결한데 그대만이 이렇게 몰라보게 변했느냐고 묻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고 억눌렀다. 환경이 이토록 사람의 용모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거짓말이 아닌 현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더는 할 말을 잃고 손을 놓아주었다. 그도 고개는 끄덕이며 애써서 모른 척하며 너스레를 떨며 받아들였지만, 눈동자의 물 끼를 느꼈는지 고개를 ‘영랑호’ 물가로 돌려서 호수의 물기와 얼버무려 버렸다.
차라리 안 만났으면 꿈이라도 간직할 것을! 어느 시인의 넋두리가 새삼스럽다.
“꿈은 깨어 무엇 하리.”
그렇다. 그 후로, 소년 늙은이는 소녀 할머니를 만난 그날의 파경(破鏡)을 잊으려 고개를 흔들었고 애써서 두 개의 다른 사람으로 형상화하면서 옛날의 소년이 길가에서 바라보든 아리따운 소녀의 청순함과 그 용모를 마음속에 끝내 간직하려, 호흡을 길게 들이쉰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