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나라는 섬들을 바탕으로 벌여야 하는 지루한 싸움은 한판의 승부를 바다에서 치러야 했다.
‘대본영(大本營)’의 체모가 손상되고 바다가 그들의 힘겨운 싸움을 지탱하고 있었다.
점점이 떠 있는 섬 하나하나는 그들의 거점이고 이 거점을 탈환하려는 연합군과의 싸움은 치열했다. 바다가 마지막 승패를 가르는 장으로 되었으니, 그들은 이런 상황에 걸맞게 우리 어린이들을 ‘해양소년단’이란 이름으로 묶어서 들볶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시대이건 어린이들은 주관적 판단 능력이 없는 미숙(未熟)이니 참여하는 집단의 선악 진위를 불문하고 참으로 알차게, 그들의 몸과 마음을 기울인다. 이렇듯, 우리 어린이의 태도도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동풍이 푸른 바닷물을 더욱 푸르고 짙게 물들이고, 하얀 파도를 몰아서 모래 위로 밀어붙이는 칠월의 오후다.
멀리 서쪽 내륙에 튀어나온 산 꼬리에 매달아서 이곳 바닷가까지 내리그은 듯, 기찻길 같은 제방이 끝나는 곳, 넓은 공터에 새까맣게 타서 시골티 흠뻑 밴 어린이 사오십 명이 줄지어 있다.
이들은 둑 높이 중간 턱에 올라 지휘하는 선생의 행동을 열심히 보고 듣고 있다. 손에는 잘 다듬어진 막대를 한 개씩 가지런히 들고 있다.
이들은 곧 구명 봉을 들어 하늘 높이 올리고 힘찬 구호를 부르며 바다로 달려들더니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 어린이라야 바다에서 싸울 수 있다고, 바다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위난을 극복하는 심성을 기른다는 취지일 것이지만 바다는 막대 하나로 다스려지는 곳이 아니다.
바닷물 속에서 건져 올린 몇, 몇의 어린이를 구하는 훈련은 짜임새 있게 재빠르게 진행된다.
웃옷을 뒤집어 단추를 끼우고 소매에 막대를 집어넣는 것, 윗도리 세 개에 막대 두 개를 끼워 넣고 건져 올린 어린이를 인공으로 호흡시킨 다음 들것에 올려서 지정한 장소까지 나르는 것을 그럴듯하게 해내는 품이 어지간히 익혔든 모양이다.
내 손은 이때부터 이미 연장에 익어졌다. 그리고 몸은 두들겨져서, 쓸모 있게 벼리게 되었다. 내 손의 촉감은 굳은 것에 길들어지고 내 몸은 바닷바람과 이글거리는 칠월의 햇빛으로 익어가며 가죽은 두꺼워져 갔다.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내게 도움이 되도록 활용하는 지혜도 싹트고 재난을 당할 때 침착하는 담력도 자랐다.
훈련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막대를 던져주어 그 막대의 다른 한끝을 잡게 하고 헤엄쳐 나오는 훈련이다.
파도에 쓸려서 제대로 되질 않는다. 내가 이끌어 뒷사람을 구조하는지 내가 밀려 뒷사람에게 구조받는지 분간 어렵게, 피차가 살아야 하는 위난의 현장이다.
막대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설혹 있다 하드래도 휴대하기에는 걸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막대를 매개로 하여서 모든 조건의 극히 일부분이나마 충족하려는 안간힘이 역력해서, 나의 되새김질을 충동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의 일과는 공습 대피요령과 총검술을 배우고 익혀야 하고 별도로 구명 봉(棒) 다루기에 더하여 해군에서나 필요한 수기(手旗)의 사용법도 익혀야 했다.
빨간 수기 한 개와 흰 수기 한 개를 갖고 글을 만들어서 상대에게 이쪽의 의사를 전하는 통신 수단이다. 이런 통신으로 주파를 타는 무선 연락망과 대적한다는 발상이 기상천외한 일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이즈음 학생들의 생각일 텐데 그때의 우리 생각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틈이 없었거니와 정보가 없으니, 미국이나 영국도 이런 수기에 의한 통신 수단을 갖고 전쟁을 수행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데바다’ 훈련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 수기를 빠르게 정확히 문자화하는 훈련을 열심히 한다.
편을 갈라서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리에 떨어지게 늘어세우고 각자의 의견을 짤막하게 전하도록 한 사람씩 바꾸어 실시하는 훈련이 우리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가 목숨을 부지하는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단 한 가지, 그 수기의 연습이 내 몸과 내 정신을 가다듬는 훈련이 된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해서 또 되뇌는 것은, 무릇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지난 것에 대하여 영욕(榮辱)을 가릴 필요가 없다. 다만 감사할 뿐이다.
그 갖가지 해석과 평가는 당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필요 불가결한 행로를 걸었기에 충분하고, 그 행적에 대한 공과는 인류의 앞날에 도움이 되도록 새로운 발상으로 재해석됨으로써 씻고 빛내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필요악이란 말이 이런 때에 쓰일 적절한 말로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살아, 적용되고 있는 산 증거이기 때문이다.
모든 건 필요해서 존재하고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궤도가 수정되고, 새 궤도에 맞추어 진행되는 것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