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곡리

외통궤적 2008. 8. 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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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6.011126. 석곡리

우리의 ‘재실 생활’이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어느 날 한 사람씩, 이 동네 저 동네로 분산해서 자생적 인구로 생활하는 것처럼 모양을 갖추는 관리체제로 바뀌었다.

내막을 알 수 없는 우리는 그냥 따라서 움직일 따름이지만 언젠가는 닥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응하고 있다. 입대가 허락되는 날까지 잠정적 조치라고 이해하여 쾌히 응하고 있다. 급식과 집단생활이 보기에 좋지 않은 모양이고 또 다른 점은 미군들의 수색작업에 어떤 정보가 들어갈까,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면사무소서 도로를 따라서 북쪽으로 한 오리쯤 올라간 곳에 자리 잡은 ‘석곡리’ 마을에 갔다. 동향으로 손바닥만 하게 옭아 바라진 작은 골짝에 있는 ‘석곡리’ 마을은 앞에 넓은 들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초가지붕을 맞붙여 지은 것으로 보아 서로 머지않은 촌수의 일가들이 뭉쳐서 사는 동네 같다.

우리나라 어느 농촌이나 비슷하다. 구장 ‘곽 씨’네 일가가 모여 사는 것 같이 생각되는 이 마을은 색다르게 높은 담이 없어서 정감이 간다. ‘덕문’ 아저씨 댁은 나를 포근히 감쌀만한 낮고 작은 집이다. 게다가 구장은 자그마한 키에 오랜 집안의 혈통을 이어 먹물이 배인 듯 겸손하고 덕망 있어 보이니 내가 더욱 편안하다. 여기선 밤에만 자고 낮엔 지서에 나가서 순경들이 하는 일을 보조한답시고 매이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의 소재를 어렵지 않게 파악하고 늘 어떤 지시가 있으면 즉각 출동하게 하는 태세가 필요한 듯하다.

아침을 얻어먹고 지서로 내려가며 난 또 여러 가지 생각에 깊이 빠진다.

지서에서 받은 아래위 녹색 군복이 어울리지 않게 품이 크다. 소매를 몇 겹 걷어 올려야 하고 가랑이는 내 몸이 들어가도록 넓어서 헐렁한데, 게다가 한길의 먼지가 가랑이를 덮어서 회색으로 변한다.

이런 내 모양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한다.

자갈 깔린 하얀 길이 어릴 때 우리 동네 길과 어쩌면 이렇게 닮았는지, 내가 천리타향에 와 있다는 느낌을 잊을 것 같다. 단지 입은 옷이 다르고 가는 곳이 다르다. 집에선 학교로 가거나 바닷가로 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지금 나는 고향 집에서 ‘숙박계(宿泊屆)’책을 들고 그렇게 가기 싫어하든 ‘지서(支署)’에 내 발로 걸어서 가니 이것이 성숙인지 코뚜레를 한 ‘해방된 포로’인지를 가릴 수가 없다. 분명 녹색의 군복 앞뒤에는 p.w의 낙인(烙印)이 없는데도 난 울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다. 난 아직 자유인이 되지 못했고 아직도 감시의 눈길이 나를 포위하고 있다. 이대로 난 오던 길을 거꾸로 돌려서 무한정 올라갈 수도 있다. 북으로. 얼마나 가다가 다시 잡혀서 어떤 운명의 갈림길에 들어설지 모를 뿐이다. 난 학교에서 ‘민청(民靑)총회’라는 이름으로 인솔돼 ‘인민군’으로 나갈 때도 이렇게 내 의지를 시험받는 계기를 겪은 경험이 있다. 이제 여기서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됨은 필시 내 의지의 박약 내지는 독립심의 결여 탓인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도약의 기회에서 주저앉히는 것인가? 어떻게 됐건 지금 난 무척이나 속이 상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게 자지러들고 죈다. 그렇다고 무모한 모험을 자초하여 새로운 함정으로 빠지고 싶진 않다. 언제나 수구(守舊)적 자세인 나, 소학교 때 일본인 담임선생님의 ‘게으름’의 경고가 여기에도 작용하는지 아리송하다. 잊히지 않는 경구(警句)임에 오늘도 문득 곱씹어 본다.

어느새 지서 앞에 닿았다. 난 오늘도 하릴없이 지서의 빈자리를 망보아야 할 참이다. 이름하여 ‘반공포로’이니 전쟁 수행에 저해 요인이 될 만한 모든 행위가 우리의 척결 대상임은 틀림없다. 해서 기피자도 잡으러 다녀야 한다. 난 먹히지 않는 나름의 존재 이유를 정립하고 있다.

난 이렇게 하다가 기회가 오면 자유인이 되련다.

지서 앞의 정자나무 그늘이 긴 신작로 길을 검은색으로 칠해서, 길게 한 도막을 잘라 내고 있다.

이 그늘만큼 길 위에 물을 끼얹는 ‘김순경’이 반겨 맞아준다.

시원한 초여름의 정자나무 밑에 녹색 아래위 군복의 허수아비가 팔을 내리고 오금을 구부려서 나무 의자에 점잖이 앉아있다.

나의 자화상이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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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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