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도가

외통궤적 2008. 8. 1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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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4.020113 술도가

네거리의 남쪽 길과 서쪽 길 가각(街角)에 들어선 집의 서쪽에 잇대어 북향집으로 길게 터잡은 술도가의 대지(垈地)는 송곳처럼 길고 좁다. 하지만 숙성(熟成)실과 부속실 및 숙직실이 딸린 사무실을 한 건물로 이어 짓고, 건물 끝에 우마차가 드나들 수 있는 대문을 달고 있다.

 

한길과 접하는 경계엔 키를 넘는 흙돌담으로 쌓고 '곱새이엉'을 이어놓았기 때문에 한길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으므로 제법 넓게 자리 잡은 양조장처럼 보인다. 유리미닫이문을 열고 판매장으로 들어가면 술통과 술그릇을 놓을 수 있는 시멘트로 된 칸막이가 낮고 넓게 가로 설치되어 있다. 그 안쪽으로 가슴높이의 큰 독 네 개에 걸러 놓은 술이 가득히 채워져 있다. 그 안쪽은 시멘트바닥이고 맞은편 한가운데 있는 우물엔 수동펌프가 설치돼있다.

 

우물 옆으로 댓 발짝 떨어져서 한 지붕 건물의 동쪽 숙성(熟成)실은 벽을 이중으로 쳐서 사이에 왕겨를 넣고 천장은 판자를 깔고 왕겨를 얹어 마무리하고는 지붕을 흙으로 덮어 기와가 얹혀있다.  보온과 냉방이 잘되도록 지은 창고 같은 곳이 바로 술을 익히는 곳이다. 판매 실 길갓 문에 연이어서 옆으로 조각유리 두 짝 미닫이문 달려있고 이 문을 열고 들면 사무실이다.

 

이 사무실에서 또 한 번 턱 높은 창호지 발린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숙직실이다. 사무실에서 작업장과 숙성 실과 부속실을 망라해서 한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낮은 벽을 치고 위는 유리미닫이창으로 시야를 최대한 넓혔으니 실효성 높은 사무실 구조인 셈이다.

 

건물이 끝나는 길가에 대문을 열고 들면 쌀 열 가마도 넘게 들어 갈만한 나무시루가 커다란 솥 에 걸려, 여기서 쌀을 찌는 것이다.

 

주위엔 넓은 공간을 만들어서 밥을 식히는 건조대를 놓도록 마련하고 그밖에 빈터엔 장작과 불쏘시개 감을 쌓았다.

 

사무실의 매장 쪽 창에서 돈을 받을 수 있도록, 또 사무실공간을 최대한 넓히고 작업현황을 파악할 수 있게, 창구에 붙이고 뒤로 물린 책상과 의자가 지극히 작은 공간을 차지하여 큰길 쪽으로 바싹 물어나 문틀에 붙어있다. 작업장을 바라보며 판매대금도 수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내 고향 친구네 집의 양조장에 비하면 아주 작고 볼품없는 시설이지만 있어야 할 것은 다 갖추고 있다. 그래서 술을 빚어 팔 수 있나보다.

 

 

다 살피고 난 다음 사무실 안의 길쭉한 나무의자에 앉아서 앞으로 내가 할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사무실 조각유리문 두 쪽의 왼편엔 ‘**양조장’간판이 붙어있고 오른편엔 ‘**당 거창군당부’ 라는 나무간판이 큼지막하게 내리 걸려있음을 보아서, 모름지기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한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사무실에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몇 해를 놀다가 여기서 기식하며 사설 야간중학교를 다니는 ‘김육곤’이란 쾌활한 애가 심부름을 하며 사무실 일을 돕고 있다.

 

 

작은 읍이지만 공장이 없는 시골에선 사람들이 선망하는 업이고 허가업종이니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여기서 발을 딛고 도약 할 수 있겠구나싶어서, 당장에는 직함도 일감도 없지만 내가 뚫고 나갈 일이다 싶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생각해본다.

 

 

여기가 출발점이란 생각이 들면서, 후견인이 없는 내게 침식을 제공하고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이분의 뜻을 이해하고 힘을 다하여 합당한 대우를 받도록 함은 오로지 내게 달렸음을 깨닫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기로 했다.

 

 

잠은 숙직실에서 숙직하는 직원과 같이 자고 세끼 식사는 살림집에 올라가서 별도로 차려주는 음식을 먹도록 자연스레 정해졌다.

 

특별히 장날만은 점심과 저녁을 시켜서 주곤 했는데, 여기에 나도 늘 끼는 것은 내가 이 건물 안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일의 갈피를 헤쳐보고 차츰 그 흐름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걷어붙이고 몸을 아끼지 않고 해냈다. 일꾼들은 자기네의 일이 수월해지니까 좋아했지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주인, 어른은 별도로 무엇을 지시했는지 모르지만 힘이 들 만한 일은 손도 대지 못 하도록 말린다.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내 장래와 직결됨을 알고, 나는 모든 일에 신중을 기했다. 이런 것은 아마도 내 품성(品性)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로, 늘 드러내 보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별도로 가려질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이었고 그렇게 되길 바라는 내 마음 또한 간절하다.

 

 

물도 푸고 술이 되는 찐쌀'고두밥도' 알알이 떨어지도록 매만지고 술을 발효시키는 균을 배양하는 곳, 사십도(度)의 국실(麯室)에서 종국을 버무리는 일도, 주저하지 않고 거들었다. 모두는 나의 성심을 의아해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기네의 고유 업무영역을 잠식할 것 같은 우려석인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렇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일을 절대로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장부도 들여다보았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장부를 홀로 터득하고 장부를 하고 있으니 사장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누가 가르쳐 줄만한 사람도 도가(都家)에는 없다. 오직 사장혼자서 매일 저녁에, 혹은 이튿날 아침에 해내는 것이다.

 

이런 것을 어느 날부터 갑자기 내가 하고 있으니 사장은 자기가 가르치지 않은 장부를 할 수 있는 나를 보고 놀라는 것이다. 또 얼마 있지 않아서는 월말보고서도 작성해서 부산 사세 청 관할 거창 세무서에 제출하고 오류 없이 통과시킬 때, 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늘 사장이 자기 친구들을 모아 놓고 아무나 하는 장사가 아니라며 자랑하고 그 고충을 털어놓는, 그런 조금은 까다로운 것이기 때문에 주변에는 아무도 손댈 사람이 없는 것으로 탕 치고 있었던 터에 일어나는 일이기에 더욱 그랬다.

 

 

모름지기 이 청년의 있을 곳을 적이 염려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느 술도가를 막론하고 복잡한 기술과 기교로써 짜여지며 숙련으로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리라. 옹고집으로 이중의 장부 없이 주어진 장부 안에서 기교를 부리는 일이기에 더욱 기가 찰 노릇이다. 이 일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해내고 있으니 어찌하랴!

 

 

전후(戰後)의 후방사회는 뭉쳐 다니는 상이군인들의 민폐가 아주 심해서 장날이면 몇 차례씩 상이군인의 성화를 받으면서도 냉대 할 수 없는 사회적분위기 탓에 많지는 않지만 번번이 응대하여야하는 어려움도 있던 때다.

 

 

어느 장날, 몰려온 상이군인에게 호되게 야단쳤다. ‘당신들의 의로운 희생으로 우리후방의 국민들이 편안히 지내고 있소. 그러나 당신들이 싸우던 그때 후방의 국민들도 목숨을 걸고 싸우기는 마찬가지였소. 다만 당신들은 총을 들고 우리는 총을 들지 않았을 뿐이요! 당신들 보다 더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총 한방 맞았다고 이렇게 행패한단 말이요? 나는 당신들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사선을 뚫은 사람이요! 돌아들 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 혼자의 힘으로 일당백으로 당신들과 대적하겠소!’ 나는 내 과거를 상기하며 추호의 위축됨이 없이 그들과 말로써 혹은 힘으로써 대했다.

 

 

이때까지 돌아다녔어도 이런 일은 처음 당하는 그들로서는 이외로 강경하고 당당한 내 태도에 기가 죽기 시작했다. 한쪽 팔이 없는 상이군인, 한눈이 없는 상이군인, 한쪽다리가 없는 상이군인, 성한 두 다리의 총상 입은 한쪽 다리를 걷어붙인 상이군인, 두개골의 상흔을 들어낸 상이군인, 이런 한 떼를 만나면 어느 영업집이든지 촌각(寸刻)을 지체치 않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거늘, 그들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이변에 오히려 혼이 나갈 지경으로 저들 행로가 벽에 부닥쳤다.

 

 

이번에는 사정을 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단호하다. ‘당신들은 훈장과 몸의 상처를 국가로부터 보물로 받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영광이요! 아무 보람 없이 죽어간 사람과 또 흔적 없이 심신의 상처를 입은 민간인들은 어떻게 하겠소! 정부의 작은 보조로 만족하시오! 두 번 다시 말하면 상이군인중앙기관에 당신들의 성명과 군번을 알려서 불이익이 주어지게 하겠소!’

 

그들은 두말없이 슬금슬금 물러갔다. 소위 ‘감찰’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여기서는 시간만 낭비했지 소득이 없을 것으로 체념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 일 이후에는 일체 술도가  문전에 나타나질 않았다. 이것을 꼬마 ‘육곤’이가 지켜보았다.

 

‘곤육’이로선 경이로웠다. 주인인 사장도 꼼짝 못하고 돈 주며 달래 보내는 판인데 맨손으로 돌려보내고, 어떻게 했는지 이후 상이군인이 얼씬도 하지 않으니 신기한 노릇이다.

 

 

내 극약처방이다. 나는 두려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러설 자리도 없고, 나 이상의 극한(極限)을 체험한 사람도 없다고 자부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오만이라면 오만이고 배수의 진이라면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선이다.  내심, 이러한 상황에서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내 과거를 울부짖고 싶었던 것이리라.

 

 

온 시골, 사람마다의 생일잔치 같은 장날의 술도가 마감 무렵에 맞은편 창문 위 손 바닥만한 하얀 벽에 걸린 둥근 괘종시계가 아홉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방방이 켜진 백열등을 구심으로 새까맣게 모인 하루살이가 저마다의 궤도를 돌며 생을 구가하면서도, 인간의 질서를 비웃듯 용케도 충돌하지 않는다.

 

밖은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주정꾼들이 누군가를 향해서, 서로를 향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욕지거리를 퍼부어 댄다. 궤도를 이탈한 인간군상이다. 나도 함께.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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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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