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념

외통인생 2008. 10. 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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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 집에 살고 계셨군요? 평범한 인사말 같았는데, 뒤에 그 말을 되새기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젊은이답지 않게 산다.’라는 말로 뒤집히면서 비웃음의 입놀림으로 비춰 머릿속에 그려지더니 그 한마디에서 수없이 튀겼을 침방울이 옷자락에서 지워지질 않는 듯했다.

오래전에 우리 집에 세 들어 살다가 이사한 후 소식 없다가 불쑥 나타나 뱉은 아주머니의 첫마디는 우리에게 과거 것에 눈뜨게 했고 미래 것에 희망을 걸게 했던 박식(?)한 골동품 아주머니의 인상을 그르쳤고, 그 말속의 말이 우리의 한결같은 삶이 옳은지 그른지를 가늠해야 한다는 고뇌 어린 생각의 촉발제로 작용했다.

아주머니를 우리 집에 재차 들일 때까진 7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아주머니가 몰아치는 삶을 사는 동안 우리 식구들은 마냥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동안에 여러 사람이 건넛방을 들락거리면서 우리 살림에 적지 않은 보탬을 주었지만, 우리는 변함없이 이 동네 이 집에 머물고 있다.

딴에는 애들의 정서를 뇌고, 자주 이사하는 것이 애들에게 알게 모르게 죄짓는다며 옴짝 않고 움츠리고 있었던 것이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우리의 생활에 도약의 불을 붙인 아주머니의 뜻은 서울 사리의 단면을 또렷하고 간명하게 일러준 꼴이 되어서, 우리는 그 말을 흘릴 수가 없었고 그로부터 하루 같이 이사를 생각하면서 골몰하는 옥죈 삶이 시작되었다.



‘아직도’의 뜻은 무엇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한곳에서 뭉개고 앉아 그 좋은 돈벌이 기회를 외면하느냐 일 테고, ‘여기’라는 말엔 우물 안 개구리를 빗대어 세상을 훑고 바삐 움직여야 무엇이건 건질 것인데 한곳에 머물러서 무슨 이득이 되겠느냐는 물음이 담겼고, ‘이 집에’라는 말엔 얼마나 다양한 조건과 풍부한 주택상품이 있는데 선택의 기회를 외면하고 한 가지 상품에만 매달려서 뭉개느냐며 우리 삶에 대한 힐책이 숨어있고, ‘사느냐?’의 물음엔 우리보다 훨씬 경험 많고 경륜이 쌓인 자기의 판단으로는 우리가 값 매겨 사는 삶을 헬 수 없다는 의문을 내뱉는, 짧은 한마디다.



나는 엥겔계수라던가 하는 생계비지수의 최저치에나마 머문다면 그것이 최상의 가치임을 저버리지 않는 고난의 길을 걸었기에, 안정된 생활만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지표일 것이라고 여기고 온 힘을 기울였다.

아주머니의 말을 빌리면 열심히 뛰지만, 한쪽 더듬이를 접고 같은 궤도를 수없이 맴도는 귀뚜라미와 같아서 이미 거둘 것은 다 거두어 버렸고 거기엔 걷거나 뛰기 쉽게 닳아빠진 반질반질한 길만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더하여, 외쪽 더듬이의 제한된 기능으로 인하여 귀뚜라미는 축소지향의 반경으로 익숙해져서 마침내는 원점에서 제자리 돌기를 반복하면서 소진되고 말 것이란 무서운 의미마저 들어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미련하게 사는 것일까? 나대로 가치 있게 장중한 삶을 살았다고 하겠는가?

작은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말을 빌리면, 그동안에 몇 바퀴를 굴렸어도 되었을 세월을 이렇게 한 원점 돌기를 하느냐는 힐책이다. 점점 그 말뜻이 귓밥을 맴돌면서 흥분은 높아지기만 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간이 돈이라면 세월은 돈을 쌓아놓은 보고인데, 나는 그 보고를 보지 못했다. 옳게 살았을까? 미련하게 살았을까? 점점이 떠오르는 크고 작은 집채들이 눈앞에 알른거린다.

사는 것은 과정이다. 그 과정이 정체되어 있다면 삶도 썩는 것일까? 그런데 사는 과정을 내 향기에 취해서만 머문다면 언젠가는 구조의 손길도 기대할 수 없고 생존의 대책조차 막연한 외딴섬에 떠밀려 온 난파선의 선장처럼 비참해진, 그것이 아닌가?

그것은 해도(海圖)에 의한 항해도 거부하고 선단에 끼인 뱃길도 멀리하고 외고집으로 콧노래만 부르면서 해류를 표류하는 어리석음의 결과일 덴데, 그렇게 해서 멀리 사라진 생활인들의 집단을 뒤늦게 그리는 꼴이 될 게 자명하다.

더하여 콘크리트로 쌓아 ‘배터리’ 식 닭장 같은 아파트로 이사 가기 싫어서 이리 틀고 저리 빼던 내가 아니었던가! 그때마다 아내는 나를 설득하는 진땀을 흘렸고 막무가내는 내게 푸념했다. 아파트로 가야 한다며.

살아 보기는커녕 보지도 못한 아파트는 그대로 층층이 포갠 닭장이고 거기에 사는 사람은 갇혀 사는 닭과 진배없을 것이란 생각에 손을 설레설레 흔드는 내게 아내의 태도는 냉담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아내는 체념했었다.



평범한 생활인의 발등에 불을 붙인 아주머니는 그동안에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도 한 가지 일에 몰두하여 마침내 청계천 8가에 골동품가게를 여는 실력을 쌓았다. 파묻힌 것을 캐어 빛내는 보람을 가진 듯했다. 아주머니는 옛것이나 지금 것이나 보는 눈을 달리해서 나름의 예측으로 자기를 일깨우고 그를 쫓아서 걷고 있었다. 집도 골동품도 변화무쌍하게 소유와 포기를 반복하면서 자기를 다지고 연마했다. 아주머니는 집을 팔아서 투자하고 옛날의 이곳으로 잠시 걸음을 옮겼다. 아주머니는 양 더듬이를 삼차원으로 회전시키면서 과거와 미래를 오갔다.

그는 골동품으로 돈을 벌었지만, 첫발을 디뎠던 우리 집 지붕 밑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첫마디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에 탄복하여 터뜨린 환성의 일갈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것에 애착을 갖는 젊은 우리의 삶이 어쩌면 그를 역으로 감동을 줬는지도 모른다. 놀라운 사실은 아주머니의 생각과 달리 우리 현실타파의 파고가 잠자지 않는다는 반작용이다.



어쩌면 이 세상을 사는 묘미의 일단일 수도 있겠다 싶고, 참으로 살맛이 나는 세상사의 관계와 작용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해서 희비가 엇갈린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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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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