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자매

외통인생 2008. 10. 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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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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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심한 정신적 괴로움을 겪고 있을 무렵 우리 내외가 함께 관심을 가졌던 어떤 종교 단체에 속한 처녀는 예외 없이 약속 시간에 들르곤 했었는데 우리가 고개 너머로 이사 한 뒤로는 아주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삶이 평형상태에 들어섰기 때문이랄까. 자기만족에 도취되어서랄까. 그런 증표이기도 했다. 틈새는 이런 연유에 더하여 아내가 봉사활동보다 일상의 만남에 시간을 더 할애하면서 비롯되었다. 곧 냉담(冷淡)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매번 허공에다가 말을 뱉는 꼴이 되었다. 우리의 늘어지는 무한 무반응에 아마도 스스로 포기했을 것이다.

 

하얀 웃옷에 내리달린 이색진 단추가 문어발 빨판처럼 가지런하여 그녀의 정돈된 머리를 그려냈다. 입 양 가장을 힘 있게 다물어 보조개의 인대(靭帶)가 뿌리내린 듯, 그래서 설파하는 그녀의 최면에 걸렸던 듯, 기억이 또렷이 남아 있다.

 

다락같이 매달려있는 산동네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몇 번이고 되풀이 한 위로의 말이 어쩌면 더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괴어 바친 말속에는 내가 반박 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위안하고픈 진실된 마음이 녹아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정 못하여, 내 입술은 어금니를 가리느라 꼼짝없이 붙어버렸다.

 

우리 집이 산동네가 아닌 것처럼 느끼게 하려는 그녀의 노력을 샀다. 다물고, 우리보다 못할 것 같은 달동네를 생각하면서, 진실한 삶이 무엇인지 풀어보는, 첫 마음 문을 열었던 나다.

 

그런 그녀가 아예 평지로 내려온 우리 집을 찾았다. 틀림없이 산동네와 달동네를 싸잡아서 괴어,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려는 심산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던 터. 내면의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내 믿음에 발을 뻗어 딛고서, 그녀와 대담할 셈으로 숨을 고르고는 괜스레 트집을 잡을 생각부터 싹틔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매의 능란한 구변 바람에 흔들려 그녀가 원하는 나무 가지에 순 걸이를 하게 될지 모를 덩굴나무처럼 살란 하다. 그녀는 언제나 닳아빠진 영문판 성서와 덧칠하다시피 밑줄 그은 한글판 성서를 함께 펴놓고 우리 내외의 근본문제에 접근하며 서론을 편다.

 

‘사시기 힘드시지요!’ ‘이 집을 장만하느라 얼마나 고생하십니까?’ ‘길어야 오륙십 년 살집을 마련하는데도 이토록 고달픈데, 영원히 살 집을 지으려면 얼마나 어려움이 따르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지은 집이 미리 마련되어있으니 아무 걱정 없이 살펴보도록 합시다.’ 말은 빈틈없는 사전(辭典)적 틀의 말이다. 그녀는 내 반문(反問)에 정연한 논리로 설명하지만 나는 믿음에 있어서만은 내 주관의 터전위에 서있기에 발판만은 요지부동이다.

 

겉으로 뻗은 새순만 더듬을 뿐이다. 그녀는 유연하게 흔들리는 넝쿨 순을 잡을 수가 없어서 열심히 설명한다. 굳어진 내 마음을 그녀의 뜻에 맞는 넝쿨나무로 만들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는데도, 나는 마음을 열지 않고 꼬치꼬치 따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앙의 뿌리가 저토록 깊게 내리며 자란 그 배경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그것은 나와의 대화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따로 있는 이야깃거리다.

 

그냥 흘러버릴 수 없는 열렬한 그녀의 믿음이기에 그렇다. 나중에 묻자니 그녀의 사생활을 후벼 파는 것 같고 더구나 과년한 지식인 처녀의 전형 같이 비치기에 피하고 싶다. 결국 적당한 시기에 그녀의 마음이 열려서 밝힐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접었다. 그녀의 진지한 태도에 압도당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알리고자하는 모든 것을 깡그리 익히고 훑어 다듬어 왔을 테니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서 그녀를 설복(說服)시킨단 말인가. 어쩔 수 없이 물러서지만, 엉뚱하게도 그녀의 종교입문이 추상(抽象)되고, 거기에 대해서 내 마음대로 재단하고 엮어내려는 괴이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

 

추측하건대 이렇다. 그녀의 전공이 영문학인데, 그 길로 내닫다 보니 내로라하는 현자와 학자들의 학문적 귀착점이 종교임을 알게 됐고, 거기에 심취하다보니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봉사의 길로 나섰고, 우리 집까지 걸음을 하지 않나 생각한다. 달관한 듯 엮어내는 그녀의 화술에서, 깊이 생각하는 그녀에게서,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내 것으로 삼는 일만 내게 남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실생활과 학문적 지식을 타래 엮듯이 엮어다가 다시 한 올씩 풀어서 우리 같은 무지렁이 넝쿨 순을 옭아맬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내가 비록 옮길 수 없는 바탕신앙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녀의 끈질긴 권면(勸勉)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가문의 명예와 일신의 영달을 내동댕이쳤다. 녹 쓸고 구멍 뚫린 대문을 두들이며 산동네 개 짖기고, 거적 붙인 판자문을 삐걱거려 달동네 닭 홰치게 했고, 달밤에 제 그림자를 끝없이 밟고 또 밟았다.

 

소스라쳐도 지치지 않는 그녀의 집념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끝내 내 바탕신앙의 길을 가고 마는 나를 향해서 그녀의 옴은 입 가장자리가 열리기를 바란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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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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