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벌써 등굣길에 나섰다.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는 아들의 뒤를 바라보니 오늘따라 애련하고 마음이 저려온다. 세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야 비로써 교문에 들어서는 통학길, 내가 데려다주고 출근하면 좋으련만 턱없이 멀고 시간도 그만큼 걸리기에 쪼개고 붙이고 해본들 맞출 재간이 없어서 포기했던 것인데도, 뒷모습을 보니 새삼 마음이 아프다.
심덕(心德)이 무던히 깊다고 생각하기엔 내가 지은 잘못이 너무나 크고 그 허물이 두꺼워서 덮어지질 않고, 내던진 제 삶을 끌리는 대로 내맡기는 그것으로 생각하기엔 아들의 나이가 너무 어리니, 이렇게 저렇게 꿰맞추어 보아도 괴로움만 더해지는, 아들과 우리 내외의 사이이다.
우리는 헌신하여 아들을 돌보아도 모자라는 죄를 지었다. 그것은 숙명인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아이의 몫까지도 함께 살아야 하는 아들의 생을 생각하면 끝없이 허전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한다. 그것은 업보인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어떻게 해서든 아들의 삶에 보탬을 주는 틀을 짜지 못하고 점점 헤 벌어지는 엉성한 틀을 얽으려 하는지, 그것도 답답하고 숨 막히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면서 이루어지는 결과는 나의 내심과는 관계없이 다른 길로 되어 이룩되니 어쩌면 그 속에 내가 그리는 아들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고 그것을 모르는 내가 이렇게 헤매는지도 모른다.
나는 한 번도 아들과 학업에 대해서 내 관심을 나누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학업과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름의 세상 보는 눈과 내 경험을 토대로 해서 나타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또 아들의 어려움을 더하지나 않을까 싶어서 은연중 마음을 그쪽으로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버스를 세 번 타는데 한 번씩만 놓쳐도 무려 삼십 분이 늦어지는데, 아마도 벌도 많이 섰을 것이고 매도 더러는 맞았을 것인데도 아들은 집에 와서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는다.
우리 내외는, 아니 나는 그것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필경 무슨 변고를 내고 말 것 같은 불안을 떨칠 수가 없다. 그 불안은 또한 내 불찰로 인한 아들의 고통이다. 아들이 자기학대로 감내하는 것 같은 이중의 괴로움을 내가 겪는 줄을 아들은 미처 모를 것이다.
어쩌면 난 내 어려웠던 시절을 아들에게 투영시켜서 나를 관조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아들의 삶에 힘과 면역력을 길러주려는, 잠재된 내 삶의 방식을 심고 있으면서 마음 아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어떤 힘에 이끌리어 선천적 인자에 후천적 경험을 보태는지도 모른다.
‘아들아. 삶은 오늘을 참고 견디는 것이니라.’
뒤 꼭지다 대고 소리 없이 부르짖는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