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외통인생 2008. 10. 25.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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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42.031114 여의도

내가 영문을 모르니 아내더러 만날 사람의 집에 들어가자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 집에 되돌아가자니 이때까지 기다린 시간이 너무 아깝다. 혹시라도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하나 염려되어서 계속 기다리자니 무한정이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짜증나지만 속으로 쑤셔 넣는다.

마냥 이렇게 흘러 보냈던 여러 날, 그 밤들을 매 번같은 허탕을 쳤으면서도 설마 오늘이야 되겠거니 하여 여태까지 속았고 오늘도 또 속을지도 모르면서 여기에 와 있다.

내 앞에 쌓인 산더미 같은 일을 처리하려면 한시인들 허송할 수 없는데, 일에 골몰하며 집에까지 싸온 일거리를 훑어보려면 긴 밤을 홀딱 새건만 모두 뒷전으로 미루고 아내의 일을 도우려 말없이 따라나선 참이었다. 아내의 곱디고운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내 딴에는 무진 애를 쓰고 있는 이즈음이다.

피땀으로 모은 알톨 같은 돈을 나 몰래 빌려주고는 그 돈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내를 말없이 도울 뿐이지만 영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내게는 말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아내의 마음을 다른 방법으로 위로할 수 없어서, 오히려 안타깝고 안쓰럽고 측은하기까지 하다. 내가 한마디 거들은 것도 없는데 새삼 뚱딴지같은 소리를 낼 수도 없으니 그저 지켜만 보려는데, 그러니 속은 시꺼멓게 타 들어간다.

달빛을 밀어낸 가로등 불빛이 사람의 윤곽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전봇대 주위를 비추고 있는데, 불빛이 무색하게 아무 인기척이 없다. 무슨 약속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인기척 없는 깊은 밤에 남의 집 대문 밖에서 마냥 기다리다니,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고요한 불빛을 흔드는 움직임, 불시에 문이 열렸을 때다. 재빨리 차 밖으로 나가서 그 집 문밖으로 나온 ‘여의도’를 맞아 무엇인가를 주고받은 다음 풀죽어서 돌아선 아내는 말없이 차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오늘 일이 또 그른 것을 알아차리고 그저 차를 움직였다.

벌써 여러 날을 이렇게 저녁 늦게 다니니 무어라 말 한마디 할 것 같은데도 영 말이 없다. 그림을 얻었을 때의 그 맑았던 아내의 얼굴이 이즈음은 오간데 없이 수심만 가득 채워서 나를 바로 보지 못한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내색을 할 수 있는 때가 이미 지났으니 지금은 아무 소용없는 것, 오직 헤집기밖에 되지 않으니 어찌하랴!

내가 이 땅에 발을 디딜 때는 청운의 꿈을 실어 출항했지만 이제는 현실의 폭풍 앞에 산산이 부서지고 조각났다. 이제 가족에게 걱정을 지우는 작은 버러지가 되어서 꾸물거릴 뿐이라는 좌절감도 엄습하고 있다. 그러면서 아내가 받은 예의 그 두 폭 그림이 자기승화에 목말라하는 아내의 정신적 외로움을 달래려는 화려한 무지개로 그려지지 못하고 현실의 물리적 치적(治積)을 촉수로 확인해야만 하는 미련한 짓을 막아서 아내의 청아한 그림을 지키지 못하는 자책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모든 희망을 내게 걸고 고생하신 부모를 버리고, 내 꿈을 가꾼 고향을 버리고, 대대로 이어온 가문의 기둥을 뽑아서 옮기기라도 하려는 듯 용단을 내렸건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의 풍요로운 정신과 육체적 평안마저 반듯이 해결 못하는 무지렁이로 전락했다는 좌절감마저 들게 한다.

‘여의도’는 아내와 나를 바닥에서 망루의 꼭대기까지 승강(昇降)시키는 구실을 톡톡히 해 냈다. 그녀는 우리에게 삶이 무엇인지를 간접으로 일깨운 반면(反面)교사였다.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아내에게 손을 내밀고 건져낼 마땅한 방법이 없다.

내가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와의 모든 거래가 완벽하게 아내의 바라는 바대로 되어 지기만을 빌 뿐이다. 아내는 두 폭 그림에 혼을 앗겼고 나는 아내의 혼을 찾으려고 육신을 허문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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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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