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증

외통넋두리 2008. 11. 1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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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증

6721.070329 주민증

 

양 팔을 활짝 펴고 푸른 하늘을 싸안으면 마음은 어느새 먼 훗날에, 아득히 먼 훗날에 아내와 함께, 내 살던 곳이 환하게 보인다. 흙내랑 풀내랑 나뭇잎냄새가 우리의 가슴을 열어 제친다.

 

잠간생각에 머리를 흔들고, 아내를 훔쳐보는 내 심장은 조여든다.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면서 흙에 묻혀 살려는 꿈을 가꾸던 아내의 기는 꺾이고, 내키지 않는 소걸음을 한다. 서울의 집은 싫단다. 남들이야 큰물에 떠내려 갈 것 같다거나 산사태가 나서 몰살을 할 것 같다면서 말리는, 이곳에 주저앉을 셈을 한 것은 내가 아직 현직에 있을 때였으니 아내의 꿈은 그 때엔 아직 새파랗게 살아있었다.

 

헌데 지금은. 신체의 일부를 때어내고 부터는 주위의 위로조차 조소로 느끼며 비웃음으로 받아들이는 아내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아가는 이즈음의 아내가 바라보는 하늘은 어둡고 칙칙 하다. 지평을 볼 수 없는 땅, 절벽에 둘러싸여 숨이 막힌다. 이런 아내의 마음을 읽는 내 심사 또한 무겁다. 아내는 그래도 자기가 살기로 작정한 이 골짜기를 기어코 놓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유별난 아내의 호기도 느슨히 늘어지고, 지금은 그저 말없이 발걸음만 옮길 뿐이다. 스스로는 가기 싫은데, 마지못해서, 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되어서, 가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좋겠지만 아내는 아닌 척하면서 스스로 가는체 하는 것이 더 안쓰럽다.

 

아내는 지금 무엇을 하러 가는지 알고 있다.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러가면서도 즐겁지 않은 것은 아내의 삶이 주민등록증을 빛나게 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주민증이란 무엇인가? 이는 생활인의 확실한 보증서가 아닌가. 그러나 그 보증이 미덥지가 않기 때문에 아내의 마음이 또한 무겁다. 아내는 입성도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에게 병색을 감추려고 얼굴을 매만졌지만 여전히 야위고 까칠하여 병색이 완연한데도 그것조차도 모른 척 대충 마무리 짓고 나를 따랐다. 예전 같았으면 질주하는 차안에서도 내가 듣건 말건 재잘거리면서 나를 바라보던 아내였건만 오늘은 말이 없다. 시야에 펼쳐지는 삶의 현장인 사실적 경관조차 가리려는 듯 처친 눈꺼풀로 눈망울을 덮는다.

 

그럴 테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는 아내의 심경으로는 도무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다. 그러나 반반이다. '호패(號牌)', 주민증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가 지금 살았다는 보증서다. 이 '호패'를 두 주먹으로 움켜쥐고만 있으면 삶이 보장되련만 아무리 두 손으로 움켜쥔들 소용이 없을 것 같고 달리, 아무리 움켜쥐어도 힘이 다해서 '호패'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이 길을 가는 심경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모른 척 하는 것이다. 주민등록증은 한낱 딱지에 불과한, 아내로서는 그래도 지푸라기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여 따라나서는 심사다. 오죽했으면 차림새가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면 또 가슴이 저며 온다.

 

주말마다 찾았던 우리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골짝을 스쳐 지나가는데도 아내는 아무 말이 없고, 나 또한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벌서 한여름이 지난지 오래다. 뜨거운 열기를 식히려든 그 때의 아내는 몸부림쳤었다. 그 열기는 청명한 오늘 하늘에 변함없는데도 아내는 아득히 저쪽에 있고, 싸늘하게 식어서 한기마저 느끼는 시월을 맞고, 지금 살아 숨 쉬는 자신을 확인하려 가는 것이다.

 

자존(自存)적 방어력이 남달랐던 아내의 운신은 언제나 적극적이었는데 오늘은 발랄하고 청순했던 해묵은 자기 사진을 내밀수가 없다. 사진사가 염라대왕의 예비심판관으로 보였을 것이다. 할 수없이 지금의 모습 그대로를 옮겨서 주민증에 부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아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렇겠지. 아무렴. 뼈다귀만 남았어도 식구들과 이승에서 함께 사는 것이 보다 낳으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으니 말이다. 풀죽은 삼베옷을 입고 저승 문을 여는 것으로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공무를 맡아보는 이가 '아직은 이승에 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지금 그대로의 사진을 찍어서 붙이시오!' 아내에게는 이렇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반쯤은 나도 염라대왕 앞으로 와있는지도 모른다. 아내의 육신이 작아지고 얇아지면서 주민증의 사진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나도 함께 작아지고 얇아지고 있다.

 

돌아오는 길. 오른쪽에는 우리의 꿈을 가꾸든 곳으로 들어가는 갈림 길이 눈앞에 보이지만 아내는 또 모른척한다. 나 또한 그대로 모른 척하고 자동차 조향 채를 꼭 잡고 앞만 보고 달려간다.

 

바위와 푸른 숲이 북한강 맑은 물과 맞닿아 뒤로 흘러간다. 아름다웠던 내 과거도 아내의 주민증에 묻혀서 흘러간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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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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