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부모 슬하에 있었다면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다가 요절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허약한 체질을 늘 걱정하시든 부모님은 내가 공부한답시고 객지에 나가면서부터 그 시름을 더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허약한 내가 부모 슬하(膝下)를 떠나 한평생을 살면서 전혀 달라졌다. 몸이 아파도 돌봐줄 사람이 없고, 어디 가서 의논할 데도 없었다. 심지어 물 한 잔을 떠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극지(極地)의 조건에서 지내다 보니 나를 믿고 나를 의지하는 버릇이 생겼고 그 버릇이 몸에 배서 오늘날까지 아무 탈 없이 살고 있으니 그야말로 신통한 노릇이다. 늘 긴장된 삶이었기 때문이리라. 아무도 없을 때 강해지는 이치가 내게 적용되었는지, 난 내가 보기에도 스스로 엄격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몸가짐을 갖고 신발 끈을 조였다. 이런 버릇은 살림하면서도 버리질 못했다.
병은 사람을 가려서 달려드는가 보다. 그렇게 병약하던 내가 모든 병을 겁내지 않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런 각오를 갖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환경에서 마음을 다잡고 나니 씻은 듯이 달아나는 병마들이다. 아마도 아픔을 아픔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그 아픔이 다음의 생존을 위해 다지는 망치질쯤으로 여기고 그대로 달게 받았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맞불을 놓는 심정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생존력과 자기조절능력을 믿었든, 까닭도 있었나 보다. 저절로 된 것이 아니고 나를 내신 그 어떤 힘을 가진 분과 온전히 담판하고 있다. 그래서 난 '그러면 좋다. 어디 해 보아라.'라는 잠정 허용의 승낙을 받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병은 미완성의 단계에서만 생긴다고. 완전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기에 병은 누구에게나 들겠지만, 한 발 나아가서, 자기제어 필요의 순간마다 완전무결하여 성장과 쇠퇴가 완벽하다면 모름지기 병이란 있을 수 없겠거늘 우리의 생활 속에서 병이 삶의 한몫 하고 있음은 아마도 우리의 삶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완성의 삶,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목표다. 이런 완성의 삶을 인간 이하의 삶에서만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병을 생활 일부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구시대처럼 징벌의 하나로 이해할 것인가는 온전히 스스로 것이니 누구나 다 선택의 기회는 있다. 자주 느끼는 일이지만 몸짓이 있는 모든 생물은 나름의 아픔이 있을 것이지만 그 아픔을 아픔으로 여기지 않고 생의 환희로써 승화시킴을 볼 수 있다. 가까이, 우리가 기르는 가축이라든가, 사육하는 야생 동물이 분만하는 것은 그들 생활의 일부로 여기면서도, 우리 사람은 종족을 잇는 섭리, 즉 동물과 같은 분만을 하면서도 하나의 병으로 치고 두려워하고 피한다.
아픔은 삶의 또 다른 환희이다. 아픔과 병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은 병이 들면 자각하게 하는 하나의 신호로써 받아들여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면 천부적 조정 능력으로 치유될 것이다. 다만 그 기간과 결과의 잘잘못 됨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두려워할 한 가지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어설픈 지식 때문이 아닌가 하여, 답답하다.
참을 수 없는 아픔은 없다. 그렇게 되면 의식을 잃게 함으로써 편안케 하는 것인데도 그 구분을 우리는 하지 않는다. 무식한 까닭이지만 나만이 믿는 하나의 신조다. 그래서 난 아픔을 하나의 교시(敎示)로 이해하려 노력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무슨 뜻을 담고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느끼는 바대로 실행한다. 결코 난 하등동물일 수 없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사람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절대자와 일체 된 삶을 살 것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병. 아픔. 이것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아픔, 송곳으로 뚫어 내리는 것 같은 아픔, 머리가 뻐개지는 것 같은 아픔,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아픔, 망치로 내리치는 것 같은 아픔, 배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것 같은 아픔,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아픔을 그대로 고요히 음미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다면 그 아픔은 아픔이 아니라 나의 맥박과 함께 조율되어 때로는 파도와 같이 밀려오며 대양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용해되다가도 어느새 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울창한 숲속으로 이끌리어 나뭇잎을 건드리면서 청량한 대기로 승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의 병은 이렇게 몸과 융합되질 않고 언제나 일탈하여 무한의 공간을 난다. 비수로 찔린 아픔을 견디기란 쉽지 않고, 정신적 고뇌는 어쩔 수 없이 있는 나를 버리고 탈출하는 것이다.
육신을 떠난다. 고요히 눈을 감고 몸의 무게를 아래로 모두 내리고 쏟는다. 그리고 나는 몸을 벗어난다. 견디기 어렵게 아플 때는 잠을 청한다. 잠도 최면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지구의 기상과 지구 활동 우주적 질서의 일환인 인간으로 나를 몰입하여 나를 던진다. 현대과학의 뛰어난 의술로도 감당할 수 없는, 어쩌면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우주적 질서를 다스릴 수 없음을 알 때, 잠은 스르르 든다. 생각의 깊이를 더할수록 빨리 빠져들고 난 육신을 떠난다.
한 생물이 나고 자라고 사라질 때까지 수많이 요구되는 환경에 적응 기회에 나름으로 적절히 대응해 가면서 살아감은 신기하다. 식물이 성장하면서 떡잎을 내고 쓸모없는 가지를 스스로 죽여 털어 내는 과정이 사람으로 친다면 병과 아픔이다. 한 무리의 비둘기가 내려앉았을 때 유심히 보면 거기에 많은 비둘기의 발가락이 잘려 나간 기형의 발을 끌고 절뚝거려도 그대로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의 병치레는 유별나다고 생각된다.
풀포기의 떡잎과 나뭇잎은 어느 병원에서 다듬어 냈으며 비둘기의 발은 저들 어느 병원에서 고쳤을까?
사람은 더욱 나은데, 어째서 못 참아 내는가? 그리고 왜 의젓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가? 오만에 찬 인간 제 탓이리라!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