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마 끝에 거꾸로 매달린 소나무가 묵직한 아버지의 마음을 실은 듯, 커서 대문조차 가리더니 금계(禁界)의 위엄을 담아 솔잎조차 짙푸르다.
온 동네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기쁨을 전하듯 소나무는 미풍에 흔들리고 아버지의 열망을 담은 햇빛은 음지를 밀어내어 처마 밑을 파고든다. 우리 집은 음지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 ‘상덕(商德)’은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담은 이름이다.
막냇동생을 기억할 수 있는 모두는 이름이다.
내가 덕(德)이란 글자에 매료되며 포근해짐은 그 글자의 뜻도 뜻이려니와 덕(德) 자를 통하여 마침표를 찍는 아버지의 한 생을 느끼기 때문이고 더불어‘상덕’을 잊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는 은덕을 입지 못하셨으니, 동생의 이름 자에 만이라도 덕을 담아주시어 장차 당신이 떠나신 후라도 그 덕으로써 못다 한 아버지의 한을 풀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부터 이렇게 되었다.
지금 난 ‘상덕’이 있어서 무엇인가 이루어질 것 같아 흐뭇하였을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와 할머니와 다른 형제들이 그 덕을 보았을 것 같아 내 마음이 흐뭇하여 그 이름이 더욱 소중해지면서 머릿속을 맴돈다.
그렇게 되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비록 지나간 일일지라도 내겐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육십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가슴에 안고 있어서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여기는 처지다. 어쩌면 나에게만 주어진 특수한 덕인지도 모르니 역설이다.
내가 집에서 나와 없는 동안에 부모님과 형제들의 고난이 고난으로 보이지 않고 꽃밭처럼 화려하게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구렁 속에 묻혀서 허우적거리는 질곡의 날을 보기도 하는, 무한 사유(思惟)의 자유를 누리는 것도 동생 ‘상덕’의 덕이라면 덕일까?! 무지갯빛으로 물들인 내 인생의 한끝이 이렇게 아름답게 지워지지 않는 까닭이 덕을 지닌 동생의 탓이려니 생각하고 싶다.
전쟁의 와중에 식구가 모두 유명을 달리했어도 ‘상덕’ 너만은 아직 이승에 남아서 네가 겪은 모든 고통스러웠던 일과, 있을 리야 없었겠지만 즐거웠던 일이 있었다면 그런 모든 일을 ‘상덕’ 너의 덕으로 내가 들을 수 있지 않겠나 싶어서 목을 늘인다. 그래도 네가 식구 중에 보다 나이 어리니 모르긴 해도 그 덕 내게 미쳐서 머지않아서 너를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내가 네 덕으로 기운을 차리고 아직 건강하게 살고 있지 않나 싶고 이 또한 네 덕인가 하여 기쁘다.
내 마음이 산란하여 시간과 공간을 마구잡이로 넘나든다. 현실에 돌아와서 생각하면 답답하게 생각이 엉킨다. 희망은 사라지고, 냉엄한 현실 앞에서 오열해야 하는 그날을 피하고 싶은 가느다란 욕심도 함께 파도처럼 일렁이니 이 심경을 끌어안을 이 누구인고! 그래도 현실로 닥치기를 바라는데, 난 ‘상덕’의 얼굴을 모르니 어떻게 동생을 만난단 말인가! 동생은 더더욱 나를 모를 것이니 선친의 이름을 묻고 일가의 지난 일을 따지고 족보를 캐면서 조금씩, 조금씩 좁혀 가며 서로를 확인해서 찾는다면 혈육은 진하게 끈적여 곧 이어지지 않겠는가! 다만 내가 세상을 버리고 네가 나를 잊고 지낸 지 육십 년이 되었는데 무엇으로 이야기의 마당을 넓혀 나가겠는가! 우리 둘의 감정을 잇는 데는 더 많은 접촉이 있었어야, 더 넓은 말의 마당이 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등골이 서늘하게 식어간다. 이 애달픈 삶을 책임질 자 누구냐! 동생에게서 덕을 빼앗아 간 자 누구냐! 기가 막히도록 억울한 ‘덕’의 증발이다.
그렇다. 도둑맞은 ‘덕’을 누가 찾아 주는가! 아무도 없다. 오직 내 마음속에서 삭이고, 곰 삭여서 지난날을 더듬고 더듬어서, ‘상덕’과 시간을 당기고 공간을 좁혀야 하리라!
말문을 어떻게 열어야 ‘상덕’을 육십 년 전의 나와 마주하게 할 것이며 시간을 줄일 것인지 부옇게 안개만 끼는 내 심사다.
육십 년을 뛰어넘을 ‘덕’도 갖고 오려나! ‘상덕’이가!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