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으로 물든 마음이 맑아지지 않는다. 내 마음은 한동안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맑은 가을날처럼 가벼운 마음이었건만 결혼식장을 나오면서부터 살랑거리는 바람도 멎고 코스모스도 시들어 곧 진눈깨비라도 내릴 것 같이 변해간다.
머리를 흔들어도 한사코 떨어지지 않는 세월이 새긴 자국, 숨을 들이켜도 가슴에 진 응어리가 묽어지지 않는 이별이 맺힌 핏자국, 지구를 날릴 한숨으로 폐부를 비워도 무겁게 가라앉아 없어지지 않는 희미한 영상(映像)의 앙금, 몸부림치며 가슴을 쳐도 울리지 않는 지난날의 억울한 공동(空洞), 내 있는 이 자리가 온통 허공인 듯 뜻 잃은 삶,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우울해진다.
나는 이승을 떠나서 저승살이하듯이 살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수많은 사람의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외면하지 않았다. 난 정작 내가 버린 고향의 혈육과 친지에겐 한 톨의 쌀알도 보태질 못하는 철벽의 울타리에 갇혀서 별을 바라보고 꿈꾸며 한 생을 살고 있다.
오늘, 아내의 이종 동생의 결혼식에 참례하면서 고향의 동생을 손톱만큼이라도 마음에 두고 있었는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걸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증발(蒸發)한 나를 찾아 밤낮으로 한숨지었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임종이 어떻게 치러졌는지! 그런대로 거적때기에 말려서 까마귀밥이나 면하게끔 흙으로나마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참아 생각조차 하기 싫은 모습으로 어딘가에 남아 계셔서 나를 아직도 기다리시는 건지, 알지 못하면서도 이곳의 많은 다른 이의 명복을 빌었다.
그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렸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까맣게 탄 육신을 끌고 문지방이나 제대로 넘어 다녔을까 싶은데도 아랑곳없이 내 눈앞에 있는 남의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기막힌 현실을 가슴에 담고도 입을 닫았다. 까칠하게 말라서 쓰레기를 뒤지는 고아의 신세가 되어 끼니나 제대로 이어갈까, 싶은 동생들의 모습을 그려나 보면서 남의 결혼예식에 참석했는지! 스스로 묻고 싶어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런 이 순간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이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또한 안다. 남의 부모를 내 부모 대하듯이 한다면 그 염력(念力)이 하늘에 닿아 우리 부모를 누군가가 나처럼 보살필 것이고, 내 형제를 생각하여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이를 아무런 보상이나 조건 없이 받들어서 힘닿는 대로 돌봐준다면 내가 갈 수 없는 그곳에서도 반드시 누군가가 나 대신 내 형제들에게 해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돕는다. 이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기에 그 믿음을 쌓았다. 그래서 발이 닳도록 뛰었다. 남들은 때로는 비웃었을 것이고 더러는 이상하게 비쳐서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열일곱 살의 나이로 이차원(二次元)의 세계 이쪽, 갇힌 이승에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과 할머니와 누나와 동생들과 함께 언제나 생생히, 멎어버린 그 시간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무리 위로해도, 미아리 고개 아래 정릉의 골짜기에 맞닿은 예식장을 나온 내 마음은 갤 줄을 모르고 소리 없는 진눈깨비만 내린다.
내 마음속의 진눈깨비를 아내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내가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내 마음은 더욱 질척하게 짓이겨졌다.
오늘, 아내를 기쁘게 하는 화창한 날씨의 동생 결혼도 내 안의 날씨를 압도하지 못하고 마는 철옹성 내 마음이다.
가을 햇빛이 해맑다. 하지만, 내 마음 음산하고 진눈깨비만 내려 질척하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