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통인생 2009. 1. 2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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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61.070327 한恨

내리사랑을 알만한 나이에 갑자기 멈추어 서서, 돌이킬 수 없도록 이미 지나온 나의 길에 서서, 잠시 뒤돌아본다.

안동의 어느 할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이순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백수가 된 아버지의 조반을 마련하느라 부엌에 들러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끼마다 조촐한 밥상이 얼마나 민망하였으면 머리를 박박 깎아버렸을까? 얼마나 애절했으면 소매를 둥둥 걷어붙였을까? 쪼그려 앉아서 아궁이를 불어대는 주름진 입, 할아버지 나이가 된 아들, 마음이 풍구가 되어 뻘겋게 비친다.

물 내리고 이파리 떨어진 앙상한 뽕나무가 둘린 넓은 울안의 덩그런 기와집에서 늙은 아들이 밥상을 들고 방문을 들어섰을 때 의관을 갖추고서 밥상을 받으시는 아버지, 그 아버지와 아들의 행색이 어색하지 않다. 불안한 기색은 엿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생은 마감되지 않았으니, 아버지의 자태는 아직 도도해야 한다. 그러니 어쩌랴! 모름지기, 형편이 어렵다고 손자네 집에 가식할 수도 없는 노릇, 죽는 날까지 내 집을 지켜야 하거늘 어찌 집을 떠나서 대처로 나갈 수 있겠는가. 대처로 나가야 한다며 아버지의 의관을 뭉개고 변장을 시켜드릴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만사를 제치고 아버지를 위해서 자기를 바치는, 그런 효심을 이웃은 외면할 수가 없었나 보다.



적은 반찬이나마 도움은 받을지언정, 며느리 손부 증손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나 보다.

정작 이 집을 지켜야 할 이들은 이승을 떠났거나 이 집을 떠나 외지로 나갔겠다. 부엌은 지극히 단조롭다. 그 자리에, 옛날 무쇠솥이 크기순으로 나란히 얹혀서 무겁게 입 다물고 옛 가세(家勢)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있을법한 그릇도 없다. 있을 만한 사람은 더욱 없다. 오직 이순을 바라보는 아들이 이렇게 넓은 부엌을 지키고 있다.

차린 밥상은 지극히 조촐하다. 국 한 그릇, 밥 한 그릇, 그리고 김치 한 보시기와 나물, 무침과 양념 보시기가 두어 개 있을 뿐이다.

아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아버지 방문 앞에 상을 놓고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리며 옷매무새를 고치고서야 상을 들고 방에 들어섰다.

늙은 아들은 아들이자 하인이자 부인이자 며느리며 손자며느리가 되어있다. 아버지는 하늘이 무너져도 선비이시다. 그 선비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충분히 읽어 들이고, 그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아들에게 아무런 말씀하시지 않음으로써 아들을 대접하는 것이다. 아들이 오직 자기 행실대로 자신에게 말할 뿐이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아들은 제 아들에게 가면 효도를 받을 것이지만, 무릅쓰고 이렇게 고고하게 아버지를 모신다.

이순을 바라보는 아들의 까까중머리와 백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의관이 함께 겹치는, 어느 매체(媒體)가 방영한 몰락한 시골 양반집의 투영이다.



내 가슴이 멘다. 끼마다 아버지와 겸상할 때 아버지는 생선의 한가운데 토막을 내게 내어 주셨는데 난 이제 무엇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가! 아버지는 생선 대가리와 꼬리만을 자시고 네게는 가운데 토막을 주셨는데도 난 갈색 등줄기 고기 점조차 가려내며 마다하지 않았는가? 색깔이 다르다고?

이제 난 아버지를 뵙기는커녕 아버지의 그림자도 볼 수 없고 모습마저 아슴아슴하니 내 곁에 널브러진 자개 상과 연회 상은 두어 무엇 하는가! 아들의 허약한 체질을 보시며 늘 걱정하시든 아버지, 난 무엇으로 응답하고 있는가! 지금 나는 밥상은커녕 생선 꼬리조차도 들고 다가갈 수 없지 않은가?



흘러간 세월, 좁힐 수 없는 공간, 이것을 극복하는 길을 난 모른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지난날의 안개뿐이다. 내가 아버지께 못다 한 바를 다른 이에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아버지를 위하는 길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게 고작이다.

하여, 세상 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어질 따름이다. 그러면 나도 아버지와 가까이 있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쩌랴! 내 힘으론 안 되는 것을. 내 마음을 이미 잘못 다스려서 여기까지 온 것을.

매체에서 본 늙은이 아들과 나, 그 백수의 선비와 아버지, 너무나 대조되어 나는 소스라쳐 잦아진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버지! 제가 지난날에 아버지 곁에서 이루지 못한 효성을 언젠가는 보여 드리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참지 못하여 이웃에서 가상의 아버지를 돌보면 어떨까요? 가상의 우리 형제들을 돌보면 될까요? 저도 아버지처럼 아버지의 손자에게 무작정 고기 한가운데를 떼어 주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되겠습니까? 아버지! 저는 뒤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이승의 모든 이에게 내 힘이 닿는 대로 아버지가 저에게 하신 것처럼 하려고 합니다. 힘이 닿는 데까지.

오래전에 어떤 매체의 방영에서 본 이순을 바라보는 아들 노인, 밥상을 들고 들어가는 이순의 노인 아들이 자꾸만 나와 겹치면서 몸부림치게 합니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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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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