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除夜)
밤이 깊은데도 잠들을 잊은 듯이
집집이 부엌마다 기척이 멎지 않네
아마도 새날 맞이에 이 밤 새우나 부다.
아득히 그리워라 내 고향 그 모습이
새로 바른 등(燈)에 참기름 불을 켜고 제상(祭床)에 제물을 두고 밤 새기를 기다리나.
벌써 돌아보랴 지나간 그 시절이
떡가래 썰으시며 어지신 할머님이
눈썹 센 전설을 풀어 이 밤 새우시더니. 할머니 가오시고 새해는 돌아오네
새로운 이 산천(山川)에 빛이 한결 찬란커라. 어떠한 고담(古談)을 캐며 이 밤들을 새우노?
/이영도(1916~1976)
'눈썹 센'다는 말에 감기는 눈썹을 붙잡던 그믐밤. '기척이 멎지 않'는 부엌에선 맛있는 냄새 진동하고 설빔은 또 어른대고…. 엄동설한에도 설맞이 집안은 훈훈하니 정겨웠다. 모두 '떡가래 썰으시며' 가래떡 같은 '전설' 풀어주던 할머니며 할아버지들 후광이리.
그렇게 이어온 제수는 가문의 긍지였다. 명절증후군 모르던 시절 얘기지만, 없는 살림에도 집집이 정성은 정갈하고 높았다. 제야의 거룩함에 추위마저 삼가는 듯했다. 한 살 더 먹는다고 몸가짐도 새삼 바로 했다. 옛 그림이 된 제야, 이제는 '어떠한 고담(古談)을 캐며' 새우시는가?//정수자 시조시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