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주(洪吉周·1786~1841)가 보은 원님으로 있을 때 일이다. 고을 효자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니 판에 박은 듯이 눈 속에서 죽순이 솟거나,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올랐다. 꿩은 부르기도 전에 방 안으로 날아들고, 호랑이가 제 스스로 무덤을 지켰다.
그중 유독 평범해서 아주 특이한 효자가 한 사람 있었다. 구이천(具爾天)은 학문이 깊고 행실이 도타웠다. 부모를 정성을 다해 모셨다. 그뿐이었다. 이상하거나 놀랄 만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1백여 년 전의 일이었고, 그를 칭찬한 사람들은 그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이었다. 선대의 유언에 따라 구씨의 효장(孝狀)은 밖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글을 다 읽은 홍길주는 아전을 시켜 후손에게 돌려주게 했다. 아전은 무심코 그것을 창고 속에 보관해 두었다가 그만 화재가 발생했다. 기록이 모두 탔는데 구씨의 효장만 말짱했다. 순찰사에게 이 일을 얘기하자 순찰사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여러 고을의 효장을 보면 몇 줄 읽기도 전에 잉어가 나오고 호랑이가 튀어나오니, 화가 나서 땅에 집어던지고 싶어지더군. 정말 효성스러운 선비였다면 물고기와 호랑이는 마음대로 부리면서 저 화재는 당해내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홍길주가 구씨의 효장만 불에 타지 않았다고 말하자, 관찰사가 말했다. "그야말로 진정한 효자다." 홍길주는 '보은군효장재기(報恩郡孝狀灾記)'에 나온다. 그는 글 끝에 이렇게 썼다. "아, 불에도 정말 지각이 있단 말인가(火眞有知)!"
다산은 '효자론(孝子論)'에서, 사람마다 기호가 다른데 효자의 부모들은 어쩌면 꿩과 잉어, 자라, 눈 속의 죽순만 찾는지 모르겠다고 나무랐다. "저들은 부모의 죽음을 이용해 세상을 진동시킬 명예를 도둑질하니, 또한 어찌된 셈인가? 이는 부모를 빙자해 명예를 훔치고 부역을 도피하며, 간사한 말을 꾸며 임금을 속이는 자들이다(彼或乘此之時, 而因以盜其震世之名, 尙亦何哉?… 是其藉父母以沽名逃役, 飾奸言以欺君者也)." 당시에 가짜 효자, 조작된 열녀가 워낙 많았다는 얘기다. 평범한 효열(孝烈)로는 경쟁력이 없다 보니 그 내용도 갈수록 엽기적으로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