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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만지(死氣滿紙)

청나라 때 시학은 당대 고증학의 영향을 받았다. 구절마다 전거(典據)가 있어 풀이를 달아야만 그 구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에서 정서는 사라지고 책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시 짓기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원매(袁枚·1716~1798)가 이런 풍조를 혐오해 이렇게 썼다. "근래 시 짓는 사람을 보니 온통 지게미에만 기대어 잗달고 성글기 짝이 없다. 마치 머리 깎은 승려의 돋은 터럭이나 솔기 터진 버선의 실밥처럼 구절마다 주석을 달았다." 제 말은 하나도 없고 남의 말을 이리저리 얽어, 그것도 풀이 글을 주렁주렁 달아야만 겨우 이해되는 시를 무슨 학문하듯 한다고 했다. '수원시화(隨園詩話)'에 나온다. 

또 그는 '답이소학서(答李少鶴書)'에서 "근래 시학이 무너진 것은 주석과 풀이로 고상함을 뽐내고 수사를 동원해 해박함을 자랑하는 것보다 심함이 없다. 자질구레한 것을 주워 모아 죽은 기운이 종이에 가득하니, 한 구절 일곱 글자에도 반드시 작은 주석이 10여 줄이나 된다(近來詩敎之壞, 莫甚於以注疏誇高, 以塡砌矜博. 捃摭瑣碎, 死氣滿紙, 一句七字, 必小注十餘行)"고 나무랐다. 또 다른 글에서는 "대개 옛사람은 전거를 사용할 때 오직 남이 알까 염려했는데, 지금 사람은 전거를 쓰면서 다만 남이 알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고도 썼다.

반대로 옹방강(翁方綱)은 시에서 고증의 한계를 극복해, 시인과 학인(學人)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이학위시(以學爲詩)'의 주장을 펼쳐 원매와 정면에서 대립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김정희와 신위 등의 시에는 주석이 으레 주렁주렁 달렸다. 승려 초의는 '동다송(東茶頌)' 시 한 수에 각주를 무려 31개 달았다. 다른 출처 수십 권에서 뽑은 인용문으로 식견을 뽐냈다. 막상 그의 인용은 '군방보(郡芳譜)' '다보(茶譜)'에 수록된 내용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제 말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

원매가 또 말했다. "전거를 쓰는 것은 마치 물속에 소금이 녹은 것같이 하여 다만 짠맛으로 알 뿐 소금 모양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用典如水中著鹽, 但知鹽味, 不見鹽質)." 제소리, 제 말을 하자는 말씀!//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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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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