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묻은 바람이 지나자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허물어지듯 땅 위로 쏟아진다. 길 위에 노란 카펫이 깔리고 길가에 선 차도 온통 노란 잎에 덮였다. 좀체 속내를 보이지 않던 나무 사이가 휑하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의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김하라씨가 유만주(兪晩柱·1755~1788)의 일기 '흠영(欽英)'을 엮어 옮긴 "일기를 쓰다"(돌베개)를 읽었다. 그중 낙엽에 대해 말한 1785년 9월 19일 일기의 한 대목이다. "안개는 자욱하고 구름은 어두운데 누런 잎이 어지러이 진다. 가랑비에 바람이 빗겨 불자 푸른 못에 잔물결이 인다. 계절의 사물은 쓸쓸해도 생각만은 번화하다(烟沉雲晦, 黃葉亂下. 雨細風斜, 碧沼微瀾. 時物蕭條, 意想繁華)." 눈앞의 풍광은 쓸쓸한데 마음속 생각은 번화하다. 낙엽은 존재의 근원을 돌아보게 한다.
이튿날인 9월 20일의 일기에도 낙엽에 대한 사념이 이어진다. "짙은 서리에 잎이 물들어 푸른빛이 자꾸 줄어드는데 여기에도 또한 품격의 차이가 있다. 붉은 잎은 신분 높은 미녀와 비슷하고, 누런 잎은 고승이나 마음이 시원스러운 선비와 같다. 뜻이 몹시 진한 곳과 뜻이 담백한 곳이 있다(葉染深霜, 靑减分數, 亦有品格之別. 紅葉似貴遊美女, 黃葉如高僧曠士. 極意濃處, 却極意淡)." 붉은 단풍잎은 도도한 미녀 같고 누런 잎은 법력 높은 고승이나 뜻 높은 선비 같다. 가을 숲 낙엽의 빛깔에서 농담(濃淡)의 차이를 읽었다. 그의 눈길은 화려한 미녀 쪽이 아닌 광달(曠達)한 선비에게로 향한다. 다시 생각이 이어진다.
"소림황엽(疎林黃葉)이란 네 글자는 한번 생각만 해도 비록 지극한 처지의 번화한 사람조차 문득 저도 모르게 쓸쓸해져서 맑고 고요하게 만든다. 이 네 글자야말로 번잡함을 틔워주는 신령스러운 부적이 되기에 충분하다(疎林黃葉四字, 一念到令人雖極地繁華者, 忽不覺寥然淸寂. 是四字足爲曠閙之神符與)."
소림은 성근 가지만 남은 숲이다. 황엽은 그 아래 떨어진 누런 잎이다. 여린 신록이 짙은 초록을 거쳐 붉고 누런 잎으로 땅에 진다. 번화하던 시절은 전생에 꾼 꿈 같다. 꽃 시절이 좋아도 사람은 안에 소림황엽의 풍경을 지녀야 세속의 번잡함을 걷어낼 수 있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