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집에서
선혈인 양 쏟아놓은 백일홍 그늘 아래
놓인 앞길 디딘 뒷길 밟히는 그 꽃잎을
벗어둔 그림자 하나 외면하며 무심한 때.
가고 오고 오고 가고 그려 그려 천 리 만 리,
눈물도 회한도 없이 피고 지고 지고 피고,
손길이 닿지 않아도 그려 그려, 그런 것을
꽃 피어 꽃 지는 일이 일도 없이 버거워라.
파랑 일어 적시는 생각 없는 심중에
길 잃은 세간(世間)의 나비 청산에 갇혔네./박정호
백일홍이 막바지 여름 길목을 붉게 적시고 있다. 백일홍은 선홍의 꽃빛도 꽃빛이지만, 만지면 가지들이 움찔대는 간지럼나무로도 유명하다. 그런 백일홍이 뒤덮는 남녘 중에도 꼭 들고 싶은 곳은 단연 명옥헌(鳴玉軒)의 꽃그늘이다! 선홍의 꽃구름이 어느 여름 궁전보다 장엄하니 말이다.
하지만 '꽃 피어 꽃 지는 일이 일도 없이 버거워라' 싶으면 '놓인 앞길 디딘 뒷길 밟히는 그 꽃잎'들이나 멀리서 짚어볼 수밖에. 그런데 '구름집에서' 그것도 '그려 그려'나 뇌기 때문일까, 묘한 허무의 그늘 맛이 끼친다. 반복으로 돋우는 가락의 흥취가 흥청대기보다는 그늘로 짙게 번지는 것이다. 뭐든 다 놓아두는 '그려 그려 천 리 만 리'의 마음 그늘인지.
//정수자 시조시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