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기업 임원의 비행기 난동으로 시끄러웠다. 눈에 뵈는 것 없이 멋대로 행동한 안하무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그런 상사에게 날마다 시달렸을 그의 부하 직원들이나 하도급업체 사람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성대중(成大中)은 귀해졌다고 교만을 떨고, 힘 좋다고 제멋대로 구는 것은 다 못 배운 사람(不學之人)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제 힘만 믿고 교만 떨며 함부로 굴다가 급전직하 나락으로 떨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때가 늦다.
1606년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사신을 보내 통신(通信)의 화호(和好)를 요청하면서 임진왜란은 자기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조선 정부는 첨지(僉知) 전계신(全繼信)에게 답서를 쓰게 해 일본이 선왕의 이릉(二陵)을 파헤친 만행을 따졌다. 이에야스는 범인이라며 왜인 둘을 잡아 사신과 함께 보냈다. 임금은 즉각 둘의 목을 베어 저자에 매달았다. 하지만 그들은 고작 스무 살 남짓의 젊은 자로, 임진년 당시 너무 어려 결코 범인일 수가 없었다. 시늉이나 하겠다는 수작이었다. 이정구(李廷龜)는 왜인들의 거짓 범인 인계를 믿을 수 없으니 이 일로 종묘에 고해 하례할 수 없다고 따졌다.
이듬해 봄 조선은 여우길(呂祐吉) 등을 통신사로 보냈다. 이덕형(李德馨)이 전별 시에서 읊었다. '신하 되어 능침(陵寢) 치욕 여태 씻지 못했는데, 편지가 제 먼저 오랑캐 땅 들어가네(臣子未湔陵寢辱 看書先入犬羊天).' 윤안성(尹安性)도 시를 썼다. '회답사란 이름 달고 어딜 향해 가는가. 오늘 와서 교린이라 나는 알지 못하겠네. 한강의 강가에서 시험 삼아 바라보라. 이릉의 송백에는 여태 가지 안 난다네(使名回答向何之 今日交隣我未知 試到漢江江上望 二陵松栢不生枝).' 치욕이 여태 생생한데, 교린이 무엇이고 회답이 웬 말이냐는 것이었다. '송천필담(松泉筆談)'에 나온다.
안 되겠다 싶으면 납작 엎드렸다가, 틈만 나면 궤변으로 도발하는 것은 일본인의 못된 버릇이다. 침략이란 개념은 해석하기 나름이니 미안하지만 예전 총리가 미안하다고 했던 말을 거두겠다고 한다. 전범이 아니라 순국선열을 참배하는 것인데 상관 말라고 한다. 어쩔 건데 하며 해볼 테면 해보잔다. 비행기에서 난동 부린 임원이나 망언을 일삼는 일본 총리나 다 못 배운 탓이다. 가르쳐야 한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