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영(李晩榮·1604~1672)이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화가 호병(胡炳)이 그린 초상화를 갖고 왔다. 똑 닮은 모습에 사람들이 감탄했고, 자신도 흡족했다. 18년 뒤 예전 초상화를 꺼내 거울 속 모습과 견줘 보니 조금도 같은 구석이 없었다. 거울 속의 나도 분명히 나이고, 그림 속 나도 틀림없는 나인데, 두 나는 전혀 달랐다. 그는 느낌이 있어 초상화 속 나를 위해 '화상찬병서(畵像贊幷序)'를 썼다.
"그대가 지금의 나란 말인가? 내가 그래도 젊었네그려. 내가 예전 그대였던가? 나 홀로 늙고 말았군 그래. 18년간 그대가 내 참모습인 줄 몰랐으니, 수십 년 뒤에야 누가 내 모습이 그대인 줄 알겠나? 다만 마땅히 각자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잘 지켜 남에게 더럽힘이나 당하지 마세나. 명산에 간직할 테니 그대는 그대의 장소를 얻으시게. 나는 몸을 삼가 세상을 살아가겠네. 내 어찌 그대를 부러워하리?" 이렇게 그림 속 나와 거울 속 나는 겨우 화해했다.
추사 김정희도 '자제소조(自題小照)', 즉 자기 초상화에 쓴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기 있는 나도 나요, 그림 속 나도 나다. 여기 있는 나도 좋고, 그림 속 나도 좋다. 이 나와 저 나 사이 진정한 나는 없네. 조화 구슬 겹겹인데, 그 뉘라 큰 마니 속에서 실상을 잡아낼까? 하하하(是我亦我, 非我亦我. 是我亦可, 非我亦可. 是非之間, 無以爲我. 帝珠重重, 誰能執相於大摩尼中. 呵呵).' 둘 다 분명 나는 나인데, 어느 나도 진짜 나는 아니니, 그렇다면 나는 어디 있느냐는 얘기다.
노산 이은상의 시조 '자화상'세 수가 또 있다. '너를 나라 하니 내가 그래 너란 말가/ 네가 나라면 나는 그럼 어디 있나/ 나 아닌 너를 데리고 나인 줄만 여겼다.// 내가 참이라면 너는 분명 거짓 것이/ 네가 참이라면 내가 도로 거짓 것이/ 어느 게 참이요 거짓인지 분간하지 못할네// 내가 없었더면 너는 본시 없으련만/ 나는 없어져도 너는 혹시 남을런가/ 저 뒷날 너를 나로만 속아볼 게 우습다.'
나는 나인가? 내가 맞는가? 그림 속 나는 그대로인데, 현실의 나는 매일 변한다. 변치 않는 나와 늘 변하는 나 중에 어느 나가 진정한 나인가? '너'나 '그'가 아닌 '나'가 늘 문제다. 내게서 내가 달아나지 않도록 나를 잘 간수하는 것이 급선무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