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룡(趙熙龍·1789~1866)이'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에 쓴 짧은 글이다. '어제도 할 수 없고 오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삼가 마음이 열리는 길한 날을 가려 선생의 축수를 위해 바칠까 합니다. 난 하나 바위 하나 그리기가 별 따기보다 어렵군요. 참담하게 애를 써 보았으나 허망함을 느낍니다. 비록 아직 못 그리긴 했지만 그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부탁받은 그림을 그리긴 해야겠는데, 붓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서화가의 그림이나 글씨가 붓과 종이만 주면 공장에서 물건 찍듯 나오는 줄 알면 오산이다.
당나라 때 서예가 손과정(孫過庭)은'서보(書譜)'에서 글씨가 뜻대로 될 때와 뜻 같지 않을 때를 다섯 가지씩 논한 오괴오합(五乖五合)의 논의를 남겼다. 먼저 오괴(五乖)다. 첫째, 심거체류(心遽體留)다. 마음은 급한데 몸이 따로 논다. 둘째, 의위세굴(意違勢屈)이다. 뜻이 어긋나고 형세가 꺾인 엇박자의 상태다. 셋째는 풍조일염(風燥日炎)이다. 바람이 너무 건조하고 햇살이 따갑다. 공기 중에 습도가 알맞고 햇살도 적당해야 먹발이 좋다. 넷째는 지묵불칭(紙墨不稱)이다. 종이와 먹이 걸맞지 않아도 안 된다. 다섯째는 정태수란(情怠手亂)이다. 마음이 내키지 않고 손이 헛논다. 이럴 때는 애를 써봤자 소용이 없다.
오합(五合)은 이렇다. 첫째가 신이무한(神怡務閑)이다. 정신이 가뜬하고 일이 한가할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 둘째는 감혜순지(感惠徇知)다. 고마움을 느끼고 알아주어 통할 때다. 대상과 일치하는 게 중요하다. 셋째는 시화기윤(時和氣潤), 즉 시절이 화창하고 기운이 윤택한 것이다. 넷째는 지묵상발(紙墨相發)이니, 종이와 먹의 조합이 최상이다. 다섯째는 우연욕서(偶然欲書)다. 우연히 쓰고 싶어 쓴 글씨다.
그림 글씨만 그렇겠는가. 글쓰기도 다를 게 없다.원고 마감을 진즉 넘기고도 글을 못 쓰고 있을 때는 중증 변비 환자가 따로 없다. 바짝바짝 피가 마를수록 어쩌자고 생각은 꽉 막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예술과 학문과 인생의 만남이 다르지 않다. 섬광 같은 한순간의 접점을 위해 우리는 오래 준비하고 또 기다린다.//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