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 (李穀·1298~1351)이 '눌재견화 (訥齋見和)'란 시에서 노래했다."말 잃고서 진작에 화복(禍福)이야 알았지만, 까마귀 봐도 암수는 분간할 수 없구나(失馬已曾知禍福, 瞻烏未可辨雌雄)." 새옹(塞翁)은 말을 잃고도 슬퍼하지 않았다. 그 말이 암말을 데리고 돌아와도 기뻐하지 않았다. 화복이 서로 갈마들어,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는 이치를 살펴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까마귀는 아무리 눈여겨 살펴봐도 누가 암놈인지 수놈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다.
까마귀의 암수 구분은 "시경" '소아(小雅)·정월(正月)'에 나온다. "저마다 제가 훌륭하다고 말하지만, 누가 까마귀의 암수를 알겠는가?(具曰予聖 誰知烏之雌雄)" 시비의 판단이 쉽지 않다는 비유로 흔히 쓰는 표현이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도 "궁달은 마침내 한 굴의 개미 되니, 시비는 그 누가 나란히 나는 까마귀를 가릴꼬(窮達終歸同穴蟻, 是非誰辨竝飛烏)"라고 했다. 한때의 실의도, 잠깐의 득의도 다 그게 그거다. 한 개미굴에 수천 마리 개미가 뒤엉기면 궁달(窮達)의 구분은 방법이 없다. 그래도 못 견딜 것은 옳고 그름의 판단이다. 까마귀의 암수 구분이 어렵다는 구실로 사람들은 제멋대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우겨 기리고 헐뜯음을 뒤집어 놓는다. 이덕무(李德懋·1741~1793)도 '우음(偶吟)'에서 같은 뜻을 담아"세간의 옳음과 그름이란 것, 까마귀의 암수처럼 분간 어렵네(世間是與非, 難辨雌雄烏)"라고 읊었다.
다들 저밖에 적임자가 없다고 하고 자기만이 해낼 수 있다고 하나 과연 누가 실상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선거 때만 되면 검증할 수도 없는 의혹이 난무하고 흑색선전이 기승을 부린다. 정책 대결은 간데없고, 흥신소 수준의 의혹 부풀리기만 횡행한다. 봐주기가 민망하다. 그 틈에 훼예(毁譽)를 헝클고, 시비를 뒤집어 보자는 속셈이다.
격투기 선수는 자기가 운영하는 술집에 온 젊은 여성이 하도 욕을 해서 살짝 밀었다는데, 그 여성은 무지막지한 주먹으로 한 방 맞아 큰 충격을 받았다고 난리다. 둘 다 성을 내며 펄펄 뛴다. 과연 누가 그 시비를 명쾌하게 가려주겠는가? 설령 시비가 명명백백하게 가려진다 해도 그때쯤이면 득실은 이미 물 건너간 뒤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