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히 앉은 곳, 차 마시다 향 사르고, 묘한 작용이 일 때, 물 흐르고 꽃이 피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추사(秋史)의 대련(對聯)에 나오는 구절이다. 일반 한시의 구문과 달리 3,4로 끊어 읽는다. 중국의 선원(禪院)이나 다관(茶館)의 기둥에 적혀 있던 글이지 싶다. 두어 해 전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를 집필할 때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이 글씨의 원본을 배관(拜觀)할 기회가 있었다.
이 중 다반향초 네 글자에 대한 풀이를 두고 여러 주장이 분분하다. 흔히 '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그대로'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지 않다. 신위(申緯)와 홍현주(洪顯周) 등 19세기 문인의 시 속에서 이 네 글자는 수도 없이 자주 등장한다.
한결같이 차를 반쯤 마신 후에 향을 새로 피운다는 뜻으로 썼다. 뒷구절이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어난다'고 했으니, 차와 향도 구분해 읽는 것이 옳다. 허균(許筠)이 '누실명(陋室銘)'에서 "차를 반쯤 따라놓고, 향 한 심지 살라보네. 酌茶半甌, 燒香一炷"라 한 바로 그 뜻이다. 이덕무도 "맑은 창 정갈한 책상에서, 향 사르고 차 달이네. 明窓淨几, 焚香 茗"라고 했다. 차와 향이 한 세트로 묶여야지, 차와 차의 향을 말한 것이 아니다.
서재에 홀로 앉아 차를 달인다. 샘물을 길어와 화로에 끓여, 최적의 상태에서 찻잎을 넣는다. 알맞게 우러났을 때 찻잔에 따른다. 빛깔을 눈으로 마시고, 향기를 코로 마시고, 이윽고 입으로 한 모금 마신다. 책을 읽느라 지친 눈을 가만히 감는다. 찻물을 머금어 내리면 식도를 타고 냇물이 흐르고 꽃잎이 피어난다.
이때 향 한 심지를 꺼내 화로에 남은 불씨에 불을 붙인다. 조용한 빈방에서 향연이 곧장 위로 솟다가 문득 흔들리더니 긴 머리채를 비끄러맨 것처럼 매듭을 엮고는 풀어지며 흩어진다. 정신이 비로소 개운해진다.
차를 마시고 향을 피우는 사이에 마음속에 일어난 묘용(妙用), 즉 오묘한 작용은 언어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냇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었다. 얼마나 분명한가. 우리는 그동안 너무 시끄러웠다. 징징대는 소음의 언어는 너무도 피곤하다. 마음을 가만히 내려놓고 물끄러미 내면을 응시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누군가? 여기는 어딘가?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