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靈光) 사는 강씨(姜氏) 성의 토호(土豪)가 이웃 백성을 곤장으로 때리며 자주 괴롭혔다. 견디다 못한 백성이 그를 다른 일로 밀고했다. 그는 제 세력을 믿고 사또 앞에서도 기세등등하다가 곤장을 맞고 나와 갑자기 죽었다. 그의 후처 이씨가 전처소생의 아들과 함께 밀고한 백성을 칼로 찔러 죽이고 관가에 자수했다.
새로 부임한 사또 임상원(林象元)이 모자를 의롭게 여겨 보고를 올렸다. 영조는 모자를 함께 좋은 곳에 유배 보내고, 그 마을에 효자와 열녀의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다. 유배지인 하동으로 가는 길가에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공경을 표했다. 노자로 준 돈만 수백 금이었다.
모자는 하동 고을 포교인 박부장(朴夫長)의 집에 묵었다. 그는 음탕한 자였다. 이씨의 미모에 흑심을 품었다. 그의 집은 방이 하나뿐이라 아랫목 윗목으로 나눠 거처했다. 박부장은 일부러 마누라와 음란한 짓을 자행하여 이씨의 음심(淫心)을 도발해, 마침내 사통하여 임신을 시켰다. 고향에 휴가를 다녀온 아들이 사실을 알고 그 길로 관가에 고발하니, 이씨는 박부장의 아내가 되려고 사실대로 자백했다.
결국 조정에까지 보고되어 이씨는 흑산도(黑山島)에 종으로 유배 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그녀는 창기(娼妓)처럼 음란한 짓을 자행했다. 아들은 어미를 고발한 죄로 강계(江界)에 유배 갔다. 효자문과 열녀문은 철거되었다.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나온다. 남편의 원수를 갚고 유배 갈 때 그녀는 살인 죄인이면서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었다. 음란한 짓을 저질러 귀양 갈 때는 창기보다 천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한때 분명히 열녀였지만, 잠깐만에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는 음녀로 내려앉았다.
성대중은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아갈 때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물러날 때는 남을 탓하지 않는다(進不藉人, 退不尤人)." 제 힘으로 나아가야 걸림 없이 떳떳하다. 물러날 때는 제 탓으로 돌리는 것이 옳다. 남의 형세를 빌려 얻은 자리는 걸리는 것이 많다. 그 결과 일이 잘못되어도 남 탓만 한다. 한때의 환호와 박수가 차디찬 냉소와 모멸로 변하는 것은 잠깐 사이다. 열녀와 음녀의 거리는 멀지가 않다. 사람의 진퇴가 참 어렵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