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얘기다 . 흉노가 쳐들어왔다. 황제는 유례(劉禮)를 패상(覇上)에, 서려(徐厲)를 극문(棘門)에, 주아부(周亞夫)를 세류(細柳)에 주둔케 했다. 황제가 직접 군문을 순시했다. 패상과 극문은 수레를 몰고 달려 들어가자 장수와 기병이 뛰어나와 맞았다. 세류에 당도했다. 선두가 들어가려 하니 문 지키는 군사가 활 시위를 메긴 채 수레를 제지했다. 선두가 화를 냈다. "천자의 행차시다. 길을 열지 못할까?"군문도위(軍門都尉)가 말했다. "군문에서는 장군의 명을 듣고 천자의 명은 듣지 않습니다." 천자가 사신에게 지절(持節)을 주어 주아부에게 보내 자신이 위로차 온 것을 알렸다. 주아부가 군문을 열게 했다.
군문을 들어서니 이번에는 벽문(壁門)의 군사가 천자의 거기(車騎)를 막아섰다. "장군의 명령입니다. 군중에서는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고삐를 잡아 천천히 갔다. 측근들이 놀라 경악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중영(中營)에 당도했다. 그제야 주아부가 나와 황제를 맞았다. "갑옷 입은 군사는 절을 올리지 못합니다. 군례(軍禮)로 뵙겠나이다." 그러면서 배례(拜禮)하지 않고 뻣뻣이 서서 읍례(揖禮)만 올렸다. 천자가 낯빛을 고쳐 예를 갖춰 노고를 치하한 후 돌아왔다.
군문을 나선 뒤 모두 주아부의 무례를 두고 펄펄 뛰며 분개했다. 황제가 말했다. "그가 진짜 장군이다. 앞서 두 곳은 아이들 장난일 뿐이다." 이후 세류영(細柳營), 또는 유영(柳營)은 장군이 머무는 군영을 뜻하는 표현으로 굳어졌다. 군기(軍紀)는 장수의 위엄에서 나온다.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군기를 내맡긴다. 저희끼리 온갖 폭력을 휘두르고 왕따를 시켜도 알면서 모른 체한다. 손 안 대고 코 풀자는 속셈이다. 문제가 생기면 덮기 바쁘다. 그래도 안 되면 책임을 전가한다. 폭력에 짓눌렸던 신참은 제가 당한 것 이상으로 후임에게 되갚는다. 이런 것이 군대인가? 정작 엄격해야 할 총기 관리는 허술했고, 인사관리는 엉망이었다. 시스템은 아예 작동되지 않았다. 잡겠다는 귀신은 안 잡고 제 동료만 잡는 꼴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군대에 보낸 부모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세류영의 기강을 어디서 찾을까? 주아부 같은 장수는 어디에 있나?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