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올해 탄신 100주년을 맞은 박목월 선생의 수필집을 정리하다가 '명주안감'이란 글을 읽었다. 아들은 아침저녁 10리씩 걸어서 학교에 갔다. 혹독한 겨울 날씨에 내의를 안 입은 채 광목옷이 빳빳이 얼면 사타구니가 따가웠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헌 명주옷을 뜯어 아들의 바지저고리에 안을 받쳐 주었다. 살결에 닿는 감각이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우연히 손자의 옷 안자락을 보게 된 할아버지가 불벼락을 안겼다. "당장 벗어라." 그러고는 어린 것을 저리 키워 뭐에 써먹느냐고 펄펄 뛰었다. 그날 밤 어머니까지 큰댁으로 불려가 할아버지의 큰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손자는 다시 그 옷을 입지 못했다. 훗날 선생은 그때의 소동에서 한 그루 교목(喬木)처럼 실팍하고 굳세게 자녀를 기르시려는 할아버지의 준엄한 마음을 읽었고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기억했다.
김언종 교수가 번역해 실학박물관에서 새로 펴낸 다산의 잡록 '혼돈록(餛飩錄)'을 보니 '이백과포(以帛裹布)'의 항목이 보인다. 당시 우리나라의 조복(朝服)이 여름엔 모시를 쓰는데 비단으로 안감을 대서 겹옷으로 만들었다. 정조가 이를 금지시켜 겉의 천이 모시이면 안감 또한 모시를 두게 했다. 정조의 이 같은 조처는 '예기(禮記)' '옥조(玉藻)'편에서 "베옷에 비단으로 안감을 두는 것(以帛裹布)은 예가 아니다"라고 한 데서 나왔다.
모시로 옷을 지어놓고 안에다 비단을 대는 것은 겉은 소박한 체하고 속으로는 사치를 부린 것이다. 겉 다르고 속 다른 행동이기에 비례로 여겼다. 겉과 속이 한결 같아야 명실상부(名實相符)가 된다. 표리부동(表裏不同)은 용납할 수 없다. 조정 대신이 비단으로 된 조복을 입는다 해서 나라의 체통이 깎일 일도 아닌데 비단으로 안감 대는 것조차 임금은 허락하지 않았다. 낡아 못 입게 된 아버지의 명주옷을 재활용해 자식 옷의 안감을 대준 것마저 할아버지는 용서하지 않았다. 당장 그 옷을 벗겼다. 불편해도 정신의 가치를 붙든다. 겉 다르고 속 다른 행동은 하지 않는다. 아무리 자식이 귀엽고 귀해도 차고 맵게 키운다. 지금은 어떤가?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