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8년 제주 어부 강두추(姜斗樞) 등이 악풍으로 일본에 표류했다. 관리가 표류민의 짐을 뒤져 사소한 것까지 빠짐없이 적어갔다. 지켜보던 조선인 통사가 "왜놈들은 잗달기가 말로 못합니다"하며 욕을 했다. 대마도에서 한 일본인 통사가 말했다. "조선은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하니 참 좋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탐욕스럽습니다." "어째 그렇소?" "큰 밥주발에 놋수저로 밥을 퍼먹으니 너무 욕심 사납습니다." 정운경(鄭運經)의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에 나온다.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에서 이 대목을 인용했다. 제목 '대발철시(大鉢鐵匙)'는 큰 밥주발에 쇠수저란 말이다. 일본 정부는 표류민들에게 매일 일정량의 쌀과 먹을거리를 제공했다. 수령한 물품은 심지어 물까지 사인을 받아갔다. 나중에 조선 정부에 그 비용을 모두 청구했다. 표류민들에게 일본인의 규정 식사량이 성에 찰 리 없었다. 일본에서 그들은 늘 배가 고팠다.
식전에 나무 한 짐을 불끈 해놓고, 고봉밥에 김치를 척척 얹어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둥근 배를 쓰다듬으며 늘어지게 한숨 잔다. 그리고는 또 들일을 나간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조선인 일꾼들의 이런 식사 모습이 퍽 탐욕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큰 재난 앞에 동요 없이 침착한 일본인을 세계가 경이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원전 사태와 구호 과정을 보다가 차츰 실망으로 바뀌었다. 예측을 넘어서는 재난 앞에서 통상의 매뉴얼이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그래도 매뉴얼을 못 놓으니 시스템이 멈춘다. 실종자 수색이 안 끝나 길 복구가 늦어지고, 길이 막혀 구호물자가 못 간다. 구호품을 보내려는 기업이나 자원봉사를 희망하는 개인은 튼실한 재무제표와 건실한 이력서부터 준비해야 한다. 구호품을 쌓아놓고 서류심사 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몇 해 전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 전국에서 달려온 자원봉사자로 발 디딜 틈 없던 우리와 참 많이 다르다. 온통 난리였다. 관민(官民)도 없고 시스템도 없었다. 무조건 덮어놓고 달려갔다. IMF 때 금반지 모으기가 그랬고, 일제 때 국채보상운동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늘 화끈하고, 저들은 항상 침착하다. 달라도 참 다르다. 그 침착이 이번 엄청난 재난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는 것을 본다. 앞뒤 가리지 않는 대발철시의 '밥심'이 위력적일 때가 있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