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歲暮)라 스쳐가는 생각이 참 많다. 중국 시 두 수를 읽어본다. 먼저 남송의 시인 신기질(辛棄疾·1140~1207)의 '채상자(采桑子)'란 작품. "젊어선 근심 재미 알지도 못한 채, 새로 시를 지어서 굳이 근심 얘기했지. 층층 누각 즐겨 오르며, 층층 누각 즐겨 오르며. 지금 와선 근심 재미 다했음을 알아서, 말하려다 그만두고, 말하려다 그만두고, '좋은 가을, 날씨도 시원쿠나!' 말하네.(少年不識愁滋味,爲賦新詞强說愁,愛上層樓,愛上層樓: 而今識盡愁滋味,欲說還休,欲說還休,却道天凉好箇秋.)" 세상 근심 혼자 짊어진 듯 인상 쓰는 것을 멋으로 알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화려한 층층누각 위에서 장안의 미희를 옆에 끼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호기도 부려보았다. 나이 드니 근심의 자미(滋味)는 덧정도 없다. 삶의 찌든 근심을 말하려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된다. 그래서 딴청삼아 고작 한다는 말이 이렇다. '거 날씨 한번 참 좋다!'
송나라 때 장첩(蔣捷)의 '우미인(虞美人)'. "젊어선 가루(歌樓)에서 빗소리를 들었지. 붉은 등불 비단 휘장 어스름했네. 장년엔 나그네 배 위에서 빗소리를 들었네. 강은 넓고 구름 낮은데, 갈바람에 기러기는 우짖어대고. 지금은 절집에서 빗소리를 듣노니, 터럭은 어느새 성성해졌네. 슬픔 기쁨과 만나고 헤어짐에 아무런 느낌 없고, 그저 섬돌 앞 물시계 소리 새벽 되길 기다릴 뿐. (少年聽雨歌樓上,紅燭昏羅帳. 壯年聽雨客舟中,江闊雲低,斷雁叫西風. 而今聽雨僧廬下,鬢已星星也. 悲歡離合總無情,一任階前點滴到天明.)" 소년시절 희미한 등불이 비단 휘장을 비출 때 술집에서 듣던 빗소리는 낭만의 소리다. 장년에 이리저리 떠돌며 나그네 배 위에서 듣던 빗소리에는 뼈저린 신산(辛酸)이 서렸다. 노년에 절집에 몸을 의탁해 지낸다. 서리 앉은 터럭 따라 슬픔과 기쁨의 일렁임은 없다. 헤어짐이 안타깝지도, 만남이 설레지도 않는다. 깊은 밤 정신은 점점 또랑또랑해져서 새벽 오기만 기다린다. 소년의 환락과 장년의 우수, 노년의 무심이 빗소리 따라 변해간다.
인생의 빛깔도 나이 따라 변한다. 안타깝고 발만 동동 구르던 시절도 지나보면 왜 그랬나 싶다. 사납던 욕심이 세월 앞에 자꾸 머쓱하다. 지난 일과 묵은 해는 기억 속에 묻어두자. 마음 자주 들레지 말고, 터오는 새해의 희망만을 말하자.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