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태조(太祖)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렀다. 섬돌 앞에 금인(金人)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입을 세 겹으로 봉해놓았다. 이상해서 살펴보니 그 등에 "옛날에 말을 삼간 사람"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은 봉해야 말조심이 된다는 뜻이었을까?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나온다.
을사사화가 일어났던 명종 때 일이다. 입만 뻥끗하면 서로 죄를 옭아매어 가볍게는 귀양을 가고 무겁게는 목숨을 잃었다. 면한 이가 거의 드물었다. 한 늙은 재상이 탄식하며 말했다. "늙마에 무료해도 할 만한 말이 없다. 이후로는 남녀 간의 음담패설이나 주고받아 파적하는 것이 좋겠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저 음담패설로 시시덕거리는 폐단이 비롯되었다. '효빈잡기(效顰雜記)'에 보인다. 이것은 입을 차마 봉하지 못한 사람들 얘기다.
윤기(1741~1826)는 말 많은 세상을 혐오해서 위 공자의 고사를 끌어와 '삼함명(三緘銘)'을 지었다. 그 앞부분은 이렇다. "부득불 말하려면 생각하고 절제하라. 그 밖에 온갖 일은 입 다물고 혀를 묶자. 부럽구나 저 벙어리, 말하려도 안 나오니. 야단치고 끊어버려 남은 날을 보존하리. 큰 말을 안 뱉으면 큰 무너짐 면케 되고, 작은 말도 내게 되면 작은 실패 있게 되네. 말은 하면 안 되는 법, 작든 크든 상관없네. 작은 데서부터 지켜 큰 허물이 없게 하리."
그는 입을 세 번 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아예 벙어리가 될 것을 맹세하는 '서음'이란 글까지 지었다. 그 중의 한 대목. "혹 손님이 와서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저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 나를 거만하다 할 것이므로, 아무 상관도 없는 한가롭고 희떠운 말이나 취해다가 얘깃거리로 삼으리라." 말세의 전전긍긍이 자못 민망하다.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이것은 우리 옛 시조의 한 토막이다. 말이 말을 낳고, 그 말이 몇 번 오가다 보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걷잡을 수가 없다. 누구 말이 옳은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 모를 지경이 된다. 차라리 입을 닫고 벙어리로 지낼밖에.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