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반 청나라의 해금(海禁) 정책이 풀리면서, 중국배의 서남해안 표류가 부쩍 잦았다. 중국배가 표착하면 나주 등 관할 지역 목사는 문정관을 파견해서 구호케 했다. 실정 파악 후 배가 부서졌으면 육로로, 배가 온전하면 고쳐서 수로로 돌려보냈다. 관련 기록만도 수십 건 전한다.
그런데 막상 현지의 사정은 달랐다. 문정관이 섬으로 건너오면 함께 온 아전들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섬 주민들이 수십명에서 백여명에 이르는 표류민에게 상당 기간 거처와 양식을 제공해도 관에서는 그 비용을 좀체 배상해주지 않았다. 표류선이 한 척 들어오면 인근 여러 섬의 경제가 결딴나는 판이었다.
형편이 이렇고 보니 표류선이 다가와 정박하려 하면 섬 주민들이 일제히 나와 칼을 뽑고 화살을 겨눠 죽이려는 기색을 보여 그들로 하여금 겁먹고 달아나게 했다. 암초를 만나 구조를 애걸해도 배가 침몰할 때까지 모른 체 내버려 두었다. 배가 가라앉아 사람들이 다 죽으면 관에서 알기 전에 배와 배에 실린 화물을 은닉하거나 불 질러 버리기까지 했다.
문정관들의 일 처리도 졸렬하기 짝이 없었다. 18세기 후반 무장(茂長) 앞바다에 표류한 중국 배에는 수만권의 서적이 실려 있었다. 문서가 있으면 베껴 적어 보고해야만 했다. 관리들은 문책을 면하려고 그 책을 모두 백사장에 파묻어 버렸다. 다산의 "목민심서" 권 3, '왕역봉공(往役奉公)' 제6에 실린 '표선문정(漂船問情)'조에 나온다.
우리나라 배도 수없이 일본, 중국, 유구 등으로 표류해 갔다가 구조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 표류민들은 오히려 대접을 받고 일부는 위로금까지 챙겨서 생환하였다. 19세기 초 제주 어부 고한록(高閑祿) 같은 자는 재미를 느껴 중국에 네 차례나 고의로 표류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제주 어부들은 외국에 표류하면 예외 없이 자신들이 제주 출신이라는 것을 숨기기에 바빴다. 예전 제주 관리가 구조를 요청하는 유구국(琉球國) 태자를 죽이고 그 재물을 탈취한 사건의 후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태안과 신안 앞바다의 해저유물선에서 연일 쏟아져 나오는 유물 소식에 환호만 할 일이 아니라,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도 한번쯤 되돌아보아야 할 듯해서 짚어 본 이야기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