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가난

고사성어 2014. 12. 14.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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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가난

 

1813년 6월 12일, 다산초당으로 이성화(李聖華)란 이가 찾아왔다. 당시 그는 남쪽까지 내려와 막객으로 있었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좀체 나아지지 않는 생활을 푸념했다. 다산은 대답한다. 물정 모르는 부인네가 서울서 살려면 고리채를 얻지 않고는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다. 결국 몇 년 벼슬살이 월급을 꼬박 모아도 1년 서울 생활 비용을 댈 수가 없다. 땔나무가 귀해 말똥을 태우고 개가죽 옷을 입고 겨울을 나는 서울 생활은 늙으면 가래 기침을 고질로 안겨줄 뿐이다. 진작 벼슬을 그만두고 산골짝에 들어가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훨씬 이익이다. 그러면서 양수리 근처 서종면에 은거해서 자신과 이웃하여 사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일정한 수입 없이 서울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딸깍발이들의 삶은 더 비참했다. 이덕무는 어머니가 영양실조 끝에 폐병으로 세상을 떴다. 시집간 누이 역시 폐병으로 죽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머니의 기침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면서 약 한 첩 못 해 드린 가난과 불효를 그는 울었다. 죽은 누이를 보내며 쓴 그의 제문은 차라리 통곡에 가깝다. 며칠을 굶다가 아끼던 '맹자'를 전당포에 잡히고 그 돈으로 양식을 바꿔와 허겁지겁 밥을 지어 먹는 광경은 눈물겹다.

 

연암 박지원도 사흘을 굶다가 도저히 굶어 죽을 것 같자, 다락방에 처박아 둔 못 쓰게 된 가께수리경대(鏡臺)라도 전당포에 잡히려고 궁리했다. 하지만 느닷없는 벼락 소리에 놀라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마저 낭패를 본 이야기를 남겼다.

 

이들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몇 백리 밖에 사는 외거(外居) 노비의 집을 찾아가 새경을 받아 와야 그나마 겨울을 날 수가 있었다. 명색뿐인 노비들이 뼈 빠지게 일해 얻은 소출을 고분고분 내줄 까닭이 없었다. 면천 현감으로 있던 박지원은 새경 받으러 보낸 마름이 오래 소식이 없자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나 애태우며 걱정하는 편지를 남겼다. 현감 벼슬에 있었음에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생계를 꾸려가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길 없는 워킹 푸어가 300만을 넘어섰다는 추산이다. 삶이 팍팍하기는 그때도 지금과 같았다. 하지만 그 처절한 고통을 딛고 박지원과 이덕무 등은 빛나는 정신의 광휘를 남겼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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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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