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낯선 풍물 속에서 자신과 맞대면하는 일이다. 1780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삼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연행길에 동행했다. 그는 여정 도중 곳곳에서 당시 조선의 맨얼굴을 보았다.
망한 지 130년이 더 된 명나라의 연호를 아직도 고집하는 나라. 백이 숙제의 사당을 지날 때면 우정 싸 가지고 간 고사리나물을 먹고 사당에 참배하며 그 절의를 기리는 사람들. 우리를 돕다가 망했으니, 청을 무찔러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얼핏 보아 당당한 북벌(北伐)의 논리. 사람들은 그들의 발전한 문물은 오랑캐 냄새가 난다며 굳이 외면한다. 대신 전국시대 연나라 왕이 황금을 쌓아 놓고 천하의 인재를 초빙했다는 황금대(黃金臺)나 범인 줄 알고 활을 쏘았는데 밝은 날 보니 바위에 화살이 깊이 박혀 있더라는 사호석(射虎石) 등 옛 중화의 묵은 자취만 찾아 나선다.
현실은 어떤가? 그토록 자랑스러운 북벌의 대의는 한눈에 보아도 턱없는 소리다. 어렵사리 준비해 간 고사리나물은 먹고 배탈이 나서 소동만 일어난다. 물어물어 찾아가 봐도 황금대는 흙무더기에 지나지 않고, 사호석은 덩그런 돌덩어리일 뿐이다. 황제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티베트의 판첸 라마 앞에 예배를 올린다. 한족(漢族) 지식인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랑캐 머리로 깎고 그 황제를 칭찬한다. 뭔가 이상하다. 우리는 저들을 위해 북벌이라도 하겠다는데, 정작 저들은 지금이 옛날보다 훨씬 낫다고 한다. 오랑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창피하지 않으냐고 물어도 고개를 내저으며 이쪽을 외려 수상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연암은 묻는다. 왜 우리는 하나로만 줄 세우기를 하는가? 이것만 되고, 이것이라야만 하는 경직된 소중화(小中華)의 자긍심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상관없는 저들의 포용과 융통성 앞에 번번이 무너진다. 그가 보기에 북벌은 허구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일기 속에다가 괜스레 '허생전'을 끼워 넣어 북벌의 허구를 풍자하고, '호질'을 베껴다가 지식인의 위선을 질타했다.'열하일기'에는 금기를 해체하는 스릴이 있다. 그의 글에 당대 독자들은 열광했다. 한 편이 나오기 무섭게 베껴 써서 나눠 읽었다. 필사본마다 버전이 조금씩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직접 수정 보완한 저본 '열하일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안에 담긴 연암의 정신도 새롭게 음미할 때가 되었다.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