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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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분열과 갈등,
주위 사람들과의 반목에 지쳐
주님께서 한순간에 이 모든 것을
화해로 이끌어 주시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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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 안에서
타올라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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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평화와 평온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의 삶을
무덤처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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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이기심과 무사안일을
태우고 정화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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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랑이 타오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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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무덤으로 만들고 있는
피상적 관계와 내적 공허함은
‘갈등’이라는 위기와 마주치면서
비로소 변화의 계기를 만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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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불과 분열을 주시겠다는 것은
죽어 있는 가슴속의 갈망을
다시 샘솟게 하시리라는 약속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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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참 생명을 체험하는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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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하느님, 오직 사랑 안에서만 당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내 영혼의 문이 활짝 열려 내게 자유의 새 공기를 마시게 해 주시며 하찮은 자아를 잊어버리게 해 주십니다. 사랑 안에서 내 전 존재는 궁핍과 공허의 포로로 만드는 나의 편협과 자아 긍정의 완고한 한계를 벗어나 여울져 흐릅니다. (중략) 당신이 사랑을 통해서 내 생명의 핵심이 되어 주실 때 오, 신비로운 하느님, 나는 당신께만 내 자신을 소진할 수 있으며 내가 품은 모든 의문도 불살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칼 라너 신부;『침묵 속의 만남』의 ‘내 생명의 하느님’ 중에서).
많은 이가 아쉬운 삶을 살아갑니다. 한을 품고 살아갑니다.
뉘라서 남의 삶을 저울 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 이들에게도 거친 숨결이 감미로운 향기로, 눈가에 어린 물기가 세상을 굴절시켰던, 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삶의 진수인 고통이야말로 본연의 내 모습이니 참아 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