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人 들사람
野人重農節(야인중농절) 들사람은 농사철을 소중히 여겨 早起開柴扉(조기개시비) 일찍 일어나 사립문을 열고 나섰더니 淸霧半峯出(청무반봉출) 안개를 뚫고 산중턱이 솟아올랐고 晨星雙鵲飛(신성쌍작비) 새벽별 사이로 까치가 짝지어 난다. 禾麻爭彧彧(화마쟁욱욱) 삼이며 벼는 키를 재며 무성히 자라고 妻子共依依(처자공의의) 마누라와 자식들은 함께 나와 일한다. 乍動田中草(사동전중초) 밭 틈에서 풀이 언뜻 움직이더니 阜螽跳滿衣(부 종도만의) 메뚜기가 풀쩍 뛰어 옷자락에 가득하다.
정조 시대의 명사 나열(羅烈·1731 ~1803)이 농촌 생활을 읊었다. 뙤약볕 아래 한창 곡식이 무르익는 철이다. 농부는 그 철을 어기는 법이 없다. 일찍 일어나 밖을 나서니 새벽안개 속에 산봉우리가 솟아 있고, 지는 별 사이로 까치가 난다. 일터로 가면서 농부가 잠깐 즐기는 산수 감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치요 허영이다. 농부에게는 들녘 여기저기서 다투듯이 자라고 여무는 곡식들이야말로 진정한 감상거리다. 처자식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이다. 땅에 붙어 일하는 들녘이 너무 적막하고 심심해선가, 메뚜기가 풀쩍 뛰어 옷깃에 가득 달라붙는다. 허리를 피고 하늘을 쳐다볼 때다. 작은 파장이 스치고 지나간 들녘에는 말없은 노동이 이어진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