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자리가 필요하다
빈 자리도 빈 자리가 드나들
빈 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 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 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 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 자리가 어디 한구석 필요하다
/오규원(1941~2007)
딱딱함은 죽음에 가깝고 부드러움은 살아 있음의 징표다. 신체도 마음도 굳어간다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 없다. 하여 아픔은 굳어간다는 것에 대한 경고다. 사회도 문화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는 얼마간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아픔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병은 낫지 않는다. 그러나 마비는 아픔이 없으니 망하는 지름길이다. 양심에 마비가 오면 개인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권력에 줄을 대고 감투를 얻으려 하며 검은돈을 받아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한다. 그것이 직업이 되기까지 한다.
빈 자리는 그래서 중요하다. 질서에서나 문화에서나 관습만 고집하는 것은 마비되어 간다는 것이다. 빈 자리는 물러나 생각해 보는 자리다. 자기 자리를 고집하지 않는 자리다. 여유요 융통성이요 반성이고 생기(生氣)의 탄생지이다. 빈 자리로 두면 돈이 되지 않는다고 모두 메우려 애쓰는 이들이여, 마비가 어떻게 오는지 생각해 봐야 하리.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