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집
애련리 계곡물소리 밤 깊어 더 깊어지고
어머니 쉰 목소리 자분자분 살아오는
그 옛집
마루에 앉아
오랜 온기 느낀다.
젖은 옷 마를 새 없이 궁핍하게 살았던
가슴 안 지울 수 없는 내 유년의 상형문자
이 가을
감잎만큼만
물들일 수 있다면… /김선희
단풍이 자지러지듯 타는 이즈음이면 마음이 대책 없이 헤맨다. 일을 핑계로 짓눌러놓은 그리움들이 다 터져 나오나 보다. 산마다 넘치는 단풍객이 또 하나의 단풍불이다. 그렇게 눈 닿는 데마다 단풍 꽃불이니 마음 어딘가로 옮겨붙는 불을 피할 재간이 없다. 그 불길을 따라나서면 빼곡한 일상도 잠시 물러나주려나, 아무 작정 없이 나서고 싶다.
그러다 닿을 옛집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나무를 서넛 두른 옛집, 식구들의 손때 발때를 윤나게 앉혀준 마루가 있다면 얼른 달려가리라. 수척해진 가을 물소리까지 둘렀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 하지만 감나무와 물소리를 두른 산마을 옛집은 주인 떠나자 감나무마저 시름시름 떠났다. 끝동부터 곱게 물들던 감잎, 가을이면 그 그늘이 유독 그립다. 아, 거기서 어머니 목소리를 '자분자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내 안섶도 '감잎만큼만 물들일 수 있다면….' /정수자·시조시인/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