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고 곧은 갈매나무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은 쓸쓸한 시다. 남신의주 유동의 박시봉이란 목수 집 문간방에 부쳐지낼 때 썼다. 삿(삿자리)을 깐 추운 방에 틀어박혀 슬픔과 한탄 같은 것들이 모두 앙금이 되어 가라앉을 때쯤 해서 창호문을 치는 싸락눈 소리를 듣다가 그는 이렇게 되뇐다.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 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날은 저물고 산은 멀다. 산 뒤편, 그중에서도 옆쪽의 바위투성이 길섶에 외로이 선 갈매나무. 저녁에 눈까지 내리니 춥고 고달프다. 하지만 나무의 ‘굳고 정한’ 기운이 이 고달픔에 그만 폭삭 주저앉지 않고 그를 꿋꿋이 서 있게끔 만든다. 해설서를 찾아보니 ‘정한’은 ‘정(淨)한’, 즉 ‘깨끗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 풀이다. 그럴까? ‘정한’은 ‘깨끗한’이 아닌, ‘정(貞)한’ 즉 ‘곧은’이란 뜻이다. 굳고[固] 곧은[貞], 목질이 단단하고 곧게 자란 갈매나무란 의미다.
김지행(金砥行·1716~1775)의 ‘밀암집(密菴集)’ 중 ‘고목부(槁木賦)’에서, “여린 자질 지녔지만 굳고도 곧음이여! 티끌 흙에 더럽혀도 뜻만은 빼어나네. 네 삶이 때와 맞지 않음을 슬퍼함이여! 세상 길에 어울려 따라 하지 아니하네. 깊은 골짝 높은 바위에 부치어 있음이여! 우거진 숲 굽어보며 혼자서 서 있구나.(依幼質而固貞兮, 凂塵土而志超驤. 哀汝生之不時兮, 莫與平露伍而模楷. 列寄絶壑之嶄巖兮, 俯重林而獨立.)”라 한 것에 거의 가깝다.
누구에게나 시련의 시간은 있다. 다만 그때의 내 자세를 생각할 뿐이다. 간난의 시절에도 나는 그 앞에 무릎 꿇거나 타협하지 않고, 쌀랑쌀랑 그 눈을 맞으면서 추운 밤 저 굳고 곧은 갈매나무처럼 꼿꼿이 서서 그것에 맞서겠다는 다짐이다. 그 생각의 힘으로 슬픔과 한탄의 현실을 그만 잊고, 앙금 위로 말갛게 떠오른 마음을 보며 그 시련과 정면으로 맞설 힘을 비로소 얻었노라고 시인은 얘기한다. 그러니 주저앉지 말고 힘내자고.
//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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