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보라
경주 황룡사 정문의 이름은 우화문(雨花門)이었다. 불에 타 퇴락한 뒤에도 많은 이의 사랑을 받았던 공간이다. 최자(崔滋·1188~1260)는 ‘보한집(補閑集)’에서 당시 우화문의 황량한 풍광이 지나던 이들을 모두 애상에 빠뜨렸다고 썼다. 학사 호종단(胡宗旦)이 이곳에 들렀다가 문기둥에 적힌 최홍빈(崔鴻賓)의 시를 보았다. “고목엔 삭풍이 울며 부는데, 잔물결에 석양빛 일렁이누나. 서성이며 예전 일 떠올리다가, 나도 몰래 눈물로 옷깃 적시네(古樹鳴朔吹, 微波漾殘暉. 徘徊想前事, 不覺淚霑衣).”
빈터엔 고목만 서 있고, 그 위로 황량한 삭풍이 울며 지난다. 연못 위를 비추던 석양빛이 잘게 흔들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찬 재가 되어 사라진 옛 시절의 광휘! 덧없는 맹세도 허망한 부귀도 모두가 한바탕 봄꿈이었던 걸까? 자꾸 미련이 남아 서성이는 발걸음 따라 나도 모를 눈물이 두 뺨을 타고 내린다.
황룡사는 1238년 몽고 침입 때 전부 불탔다. 그로부터 백 년 뒤 민사평(閔思平·1295~1359)은 당시 민간에서 부르던 노래를 한시로 옮긴 ‘소악부(小樂府)’ 연작 중에서 황룡사 우화문을 노래한 시 한 수를 더 남겼다.
시는 이렇다. “고운 임 보고픈 생각이 나면, 황룡사 문 앞으로 달아 오소서. 빙설 같은 그 모습은 비록 못 봐도, 그 목소린 여태껏 귀에 들려요(情人相見意如存, 須到黃龍佛寺門. 氷雪容顔雖未覩, 聲音仿佛尙能聞).” 시로 보아 우화문은 당시 남녀가 찾아와 밀회를 나누던 데이트 장소로도 사랑을 받았던 듯하다.
변치 않겠다던 맹세는 시들고 임은 떠났다. 그래도 나는 그가 그립다. 그가 생각나면 무턱대고 황룡사 우화문의 빈터를 찾는다. 그곳에서 고운 임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는 없지만, 눈을 감고 남은 기둥에 손을 가만 얹으면 바람결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또렷이 들려올 것만 같다. 그립던 그 시절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사는 일 아무리 팍팍해도 눈을 감으면 되살아나는 성소(聖所)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나는 문득 치유된다.
‘정민의 세설신어’는 오늘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정민;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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