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數)는 마술사처럼 우리를 홀리기도 하고 옥죄는 사슬이 되어서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고 가기도 하는데, 어쩌면 인간의 사고영역에서 제일 영악한 것이 이 숫자인 것 같다. 난 요즈음 수에 포로가 돼서 억압받으며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생각해 본다. 앞산의 어느 나무가 거느린 잎이 몇 개며 거느린 가지가 몇 개며 제가 피운 꽃송이가 몇인가를 일일이 세고 있다면, 모름지기 그 나무는 그 세는 때로부터 말라죽을 것이다. 잘린 가지를 오므리는 데 무엇이 얼마가 필요하고 잎이 떨어지면 새잎 내는 데 무엇이 얼마가 필요하고, 이러기 위해서 밤낮으로 지켜가며 햇빛 받은 시간이 얼마며 동화한 양이 얼마인지를 재야 한다면 말이다. 나뭇잎이나 꽃잎에 부는 바람의 세기를 재야하고 또 꽃을 피울 때 열매도 함께 생각하여, 벌이나 나비를 불러 모아야 하고 그들에게 수고를 생각하여 보상을 계산해야 하고 또 달린 열매를 새들이 따 가면 낱낱이 세었다가 어딘가에 청구해야 하고, 가을이 되어서 잎 마르면 차례를 정해서 떨어내야 하니 그 차례를 매겨야 하고, 그동안 그늘에서 고생한 가지를 세어놓았다가 이른 봄에 일찍이 도태하는 등 수없이 많은, 수 놀음을 마땅히 해야 하련만 나무는 모든 걸 셈 없이 천연대로 살아가니 이 얼마나 편하고 자유롭고 복 받은 삶인가!
모르지. 그들도 사람 모르게 셈을 하는지?
이것은 고작해야 나무다. 그런데도 아무 탈 없이 잘만 살아가고 있다.
참새도 마찬가지다. 새들이 수를 안다면, 풀씨를 세어 맡아 놓아야 하고 무리에서 없어진 참새를 세어야 알을 더 낳을 것이라고 여기고, 갈 곳과 못 갈 곳을 세어 챙겨야 나래를 몇 번 움직여 덜 아플 것이라고 계산하고, 먹을 것과 저장할 열매를 세어 가려야 하고, 이를 준비할 시간마저 일일이 수 놀음을 한다면 한시도 견디지 못하고 자결하고 말 것이다. 다행, 새들은 수를 모르니 마냥 행복하고 마냥 즐겁기만 하다. 모르지, 그들도 셈하는지!
내가 어줍게나마 수의 마술에 끼어드는 것은 받을 수 있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나마 나를 지탱하는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부지하려는 자구(自求)의 한 방편으로, 적극 참여로 나를 알고자 함이다.
난 그 많은 수의 어디에 박혀있는가? 내가 빠지면 어떤 변화가 있는가? 난 하나의 병사로써 그 인정을 참으로 받고 있는가? 알고 싶어서 고통을 무릅쓴다. 많은 사병은 자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단지 자기를 지도(指導) 감시하는 ‘고참(古參)’ 및 상사(上司)와 끈으로 엮어 매는 단순한 연결 개념으로만 알고 있기에 그 존재를 지극히 과소하게 여기는 편견으로, 자주 탈영이나 미 귀대의 우를 범하는 것이다. 즉 작은 모래알이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흥미가 없고 피동적이다. 따라서 늘 피곤하고 지루하다.
매사는 참여함으로써 그 고통이 극복됨을 잊고 있다.
단위부대의 병력이동이 전군의 움직임과 궤를 같이하여 한 사람도 어긋남이 없는 하루가 되어야 비로써 새날을 맞는, ‘날 보게(日報 係)’의 정신적 피로와 긴장된 하루하루가 내 심신을 단련시키고 있다.
이산의 뻐꾸기가 디딜방아고, 내리꽂듯 이 고을을 울리면 저 산의 뻐꾸기가 디딤판 내리밟듯 저 산을 울린다. 아낙의 손짓이 방아 고에 일렁이고 낭군의 디딤발이 미끄러질까 조마조마한, 뻐꾸기 화음이다. 뻐꾸기 방아 틀 오르내리며 쌍곡(雙曲)으로 방아 찧고, 열린 문 바람이 병사(兵舍)를 꿰뚫어서 내 마음을 띄우는데, 텅 빈 병사(兵舍)엔 ‘일보 변동’ 아직 없고, 기다리는 전화벨이 시각을 깎아, 내 마음 깎아낸다!
초조하다. 한 발짝을 움직일 수 없는 ‘변동 시간대’의 내 모습은 그대로 시간의 노예요 수의 노예다.
뻐꾸기의 널뛰기 쌍곡이 여러 패로 늘어난다.
일보를 쓰고 나야 뻐꾸기를 찾아 야영장에 합류할 텐데!/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