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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통궤적 2019. 8. 2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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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아침저녁은 시원하다. 그러나 기승을 부리는 한낮 여름 열기는 아직 호박잎이 느려지게 머물러 앉아 있다. 무섭도록 내리 쬐는 불볕을 피해서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나아간다. 들판에는 풀 먹인 중이적삼을 걸친 농부만 하얗다. 물고를 보느라  여기저기분주히 걸음을 옮긴다. 녹색 들판에는 긴 장마를 마무리하는 농부의 엎드린 모습이 흰 두루미 같이 널려있다.
기차는 어느새 간역 벽양을 잠깐 스치고 들 한가운데 있는 마을을 흘러 보내며 지평을 어지럽게 끌어온다. 동해의 수평선이 사라지고 방풍림 소나무 숲이 실오리같이 길게 늘어져서 빙그르르 돌고 있다. 사발에 물 담은 듯이 가득한 푸른 들판을 축음기 판 돌리듯이 돌린다. ‘통천읍을 향해서 내닫는 기차화통에서 길고 우렁찬 기적이 울렸다. 보아, 벌써 읍에 들어가고 있나보다. 힘차게 뿜어 올린 연기 그림자가 긴 객차그림자위에 덮쳤다가 사라진다.
제방 둑에만 올라가면 바다가 보이는 곳, 내가 살던 마을을 떠나서 넓은 벌판을 가로질러 내륙으로 들어온 것이다. 산등성은 긴 능선을 따라 이어지고 그 능선이 끝나는 곳이 금란앞바다인가보다. 나는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느꼈다. 하늘과 땅이 맛 닿은 곳, 아무것도 없는, 저 하늘 끝이 내가난, 내가 자란 내 고향이다.
잦지 않은 기차시간을 맞추어 타느라 일직 나서긴 했어도 싸온 도시락을 멋적어서 혼자 먹을 수가 없다. 넓은 객차에도 드물게 손님이 있는지, 통로엔 왕래가 없다. 농사철인 때문이다. 기차는 덜커덕거리고 몹시 흔들리며 통천역에 들어갔다. 이곳에선 목마른 기차가 물을 먹고 가는 곳이라서 화통에는 시꺼먼 물주머니가 잇대어져있고 역무원들은 분주히 오간다. 그러나 빨간 완장을 찬 기관사는 느긋하게 오른 팔을 창 밖에다 깊숙이 끌어내어 기차꼬리를 훑어보며 담배연기를 뿜어낸다. 화통의 커다란 쇠 바퀴 밑에서 올라오는 집채 같은 김 뭉치가 담배연기를 삼켜버리고 말았다.
기차는 헐떡거리며 덕고개를 넘었고 이어내리 달려서 낯 설은 들을 돌리면서 고저읍으로 빨려들어 갔다. 산봉우리에 솟은 바위, 바위의 색이 검고 칙칙하다. ‘덕고개까지만 내 고향 흙 바위이고 덕고개를 빠지면서 산이 검은흙으로 이색(異色)져서 이국의 산야를 보는 것 같다. 개울의 모래자갈이 검고 깎인 절벽의 바위가 검다. 푸른 초목을 제외한 모든 것이 검다. 멀리 탄전이 보인다. 뚫어낸 채굴 갈탄 찌꺼기가 풀어헤친 여인의 머리같이 검게 넓게 아래로 퍼져 내려있다. 눈에 들어오는 내 고향마을들녘의 색깔은 푸른 일색에 흰색 흙살이 드러나는 것과 달리 고저의 들과 산은 푸른 일색에 검은 흙살이 드러나서, 고향과 타향은 흑과 백으로 대조되었다.
밟으면 부서지고 비바람이 불면 떨어져 나가는 화강암기운을 받아 물러빠지게 자란 내가 앞으로는 무쇠같이 단단하고 밟아도 부서지지 않고 비바람이 불어도 할퀴지 않는 현무암의 기운을 받으러 감히 진입하는 것이다.
검고 칙칙한 전형적 공장지대 같았다. 평화로운 마을을 점점 멀리 하는 것 같은 외로움과 그리움이 밀려온다. 새로운 환경에 막다드린 내가 가는 곳은 예비소집, 시험장 가는 길이고 그곳은 저 유명한 '관동팔경'의 하나인 총석(叢石)등허리의 양지바른 곳이다.
검은 운동장이 무섭기도 하려니와 정이 가지 않는다. 아무려나, 나고 자란 곳과 같기야 하랴, 하지만 이 곳도 딛고 넘어야할 내 앞의 길이려니 다짐하고 애써서 설레는 가슴을 달래어본다. 교사는 검지 않았다. 겉은 연한 녹색으로 칠해지고 교실 안은 희고 밝았다. 정남향이여서 채광도 잘되어 북쪽복도까지 밝게 보였다. '벽에 붙은 흑판'은 이때 처음 보았다. 이색 진 책상의 모양이 좋아 보이기보다 교실이 남의 집 같아서 낯설었다.
주의 사항이 있었고 수험표와 자리를 확인하고 곳 바로 역으로 달려가야 했다. 내일의 시험을 위해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시험시간과 아침기차의 시간이 들어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일 일이 불안하고 초조하다.
이날만은 농사일과 아버지의 어려움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람의 사고는 깊이가 없나보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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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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