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천막의 사방휘장(揮帳)이 도르르 말려 올라 있다. 사이사이 받혀진 작은 나무 기둥이 천막 안의 두 개의 큰 기둥을 향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이 작은 기둥은 제 머리에 매달린 댕기 끈을 팔 삼아서 뒤로 팽팽히 당겨 버티고 서서 훈훈한 사월의 봄바람을 천막 안으로 들이켠다. 바람은 훤하게 트인 천막 안을 휘돌며 한껏 부풀려 올리고 있다.
간간이 뒷산의 나뭇잎 소리가 소슬바람을 타고 들려오고, 풀 향기가 흙내를 머금고 천막 가득히 퍼진다. 그러나 향(香)은 보이지는 않는다. 어릴 때 논두렁 가에서 해 가리개 풀집 속에서 맡았던, 바로 그 냄새다.
난 이른 봄에 뽑아먹든 삘기가 보여준 봄의 맛을 잊을 수 없어 도리어 흙이 그립다. 자연을 경외하여 차라리 그 속에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리라.
며칠 전까지 혼란하든 수용소 안은 언제 소요가 있었느냐 싶게 한가롭고 조용하다.
드나드는 출입구 한쪽 구석에 어디서 들여왔는지 모를 자그만 풍금이 고즈넉이 하얀 이빨을 길게 드러내고서 알아들을 수 없는 곡을 울려대고, 앞에 앉은 땅딸막한 체구의 밤톨 같은 머리를 한 포로는 연신 고개와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풍금의 하얀 이빨을 문지른다. 그 작은 키의 포로는 연신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다. 난 한 소절의 곡조도, 한마디의 가사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어제까지 보이지 않던 이 풍금은 저곳에 놓인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만사가 서로 상관되어 조화되는지, 어제까지 내 눈에 들지 않던 풍금이 내 눈에 띄는 그 순간에 바로, 귀가 뚫리면서 풍금 소리에 관심이 갔다.
풍금이 비어있는 틈을 타서 가까이 갔다. 풍금을 타던 작은 키의 포로 동료가 없기에 마음대로 풍금 앞에 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내 식대로. 묻지도, 알아보지도, 찾아보지도, 않고 대뜸 건반 위에 손을 얹고서 차례대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소음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각 음가를 익히고, 곳 어설픈 옛날의 동요를 한 소절씩 반복해 본다.
들켰다. 아니, 그 사람 것도 아니련만, 난 남의 밭 무 뽑다 들킨 애처럼 빤히 얼굴만 마주 볼 뿐이다. 무안을 어디에다 담을 수가 없어서 얼굴만 붉히고 물러서려니, 땅딸막한 키의 그 사람은 친절히 나를 도로 앉히고 자세히 설명한다.
이 모든 일을 아무도 눈여겨보지도 않고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풍금 소리는 포로 누구에게도 사치스러울 뿐, 한 마리 들새의 지저귐에 다를 바 없는 소음 덩어리다.
나도 그랬으니까!
풍금은 어느 독지가의 주선으로 드려놓게 됐나 보다. 어쩌면 어떤 종교단체에서 들여놓았는지도 모른다.
느긋한 아침 한나절, 마냥 한가롭게 늘어져 있는 포로들의 하루가 긴 봄날의 품앗이 일 같이 한없이 길다.
논다는 것, 더군다나 손바닥만 한 철망 닭장 안에서 논다는 것은 그대로 형벌이다. 우리는 이미 형벌을 받는 위치에서는 마음속으로나마 벗어나 있어서, 더 어려운 하루가 되고 있다.
풍금을 가르치던 ‘이동순’은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대선배고 고향은 함경도 ‘청진’이란다.
한참 날 붙들고 씨름하든 ‘이동순’ 형은 자기를 이렇게 소개하곤 내 고향 ‘통천’을 잘 안다고, 내가 태어난 ‘염성(濂城)’은 거리 양쪽에 맑은 물이 흐르는 아주 맑고 인상 깊은 곳, 자기가 여러 곳을 다녀 보았어도 그렇게 좋은 곳은 처음 보았노라고 극찬한다. 하긴 내 말이, ‘염성濂城’ 은 물로 둘러쳐진 성이니 물을 빼면 있을 자리를 잃노라고 하니까 그대로 수긍하는 그는 낙천적이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아서 편안하고 부담 없다.
통로 건너편, 문가의 풍금 자리에서 댓 사람의 자리를 비켜 자리 잡은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아서 긴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흩어진 그의 보따리에서 내 눈에 번쩍 뜨이는 책 한 권이 있다. 무심코 내 손이 그리로 간 것을, 그가 나보다 먼저 그 책을 집어주면서 손길이 부닥침으로써 알았다.
‘천주 존재론’, 한자(漢字) 일색의 일본 책이지만 망설이지 않고 받았다. 거기에는 내가 몰랐던 것, 궁금하던 것, 따져야 할 것이 있을 것 같아서 더듬거리면서도 모르는 한자를 물어가며 발음하고 뜻을 살펴나갔다. 그로부터 난 신(神)에 대한 무한탐구욕이 발동됐다. 신이 탐구의 대상으로 되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처지에서 책은 내 손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번민과 갈등으로 점점이 이어온 내가 진정으로 찾는 진리의 빛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으로 가득하다.
무릎을 칠 수 있는 대목이 한두 곳이 아니다. 난 이제까지 ‘진화론’에 심취해 있었다. 태반에서 자라는 태아의 성장 과정이 생물진화의 전 과정을 축소한 것이라서 사람도 짐승에서 비롯되었다든지, 유인원에서 인간과 동물의 종이 분리되었다든지, 동물과 사람의 다른 점이 정신 곧 영이 아니라 사람은 도구를 만들 수 있고 짐승은 도구를 만들 수 없는 점이 동물과 사람을 구분 짓는 기준이라는 점이라든지, 혼은 사람이 죽으면서 소멸하고 만다는 것과 따라서 내세는 허황한 망상이라든지, 이 세상의 본질은 물질이어서 물질 외에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든지, 이런 물질로 구성된 인간이니 죽으면 각 그 원소대로 환원하면 그만이지 혼은 없다든지, 그리하여 물질은 반응하고 이합(離合) 함으로써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낼 뿐이고 그 질량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므로 오직 물질의 추구가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이라든지, 또 이런 것들은 변증법으로 논증이 되기 때문에 절대적 가치일 수밖에 없다든지, 따라서 신은 없다고 하는, 이제까지 학교에서 배우고 익혔던 모두의 근본이 흔들리게 되었고, 나의 좁은 사고력에 변혁이 태동 되어서 배웠던 모두가 뿌리째 흔들리는 혼돈이다.
며칠이 걸렸는지 모른다. 책을 이어 내놓고, 또 내놓고 끝없이 이어진다. 세기를 거쳐 지어낸 선각자들의 고뇌 어린 책을 읽음으로써 그들이 생을 다해 이룩한, 그들의 혼이 담긴 책들을 쉽게 맞이할 수 있어서 며칠 사이에 그 겉이나마 핥아 맛볼 수 있음이 지극한 행운이라 여긴다.
이렇게 읽는 동안에 내 틀은 잡혀가고 내 사는 보람도 알이 차고 있다. 내가 새로이 알게 된 대강만으로도 난 살 가치를 느낀다. 내 믿음이 싹트고 있다.
‘진화론’은 신의 창조 과정이고 이 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인류의 긴 역사, 진화(창조)의 역사는 우리가 사는 지구의 공전주기의 시간개념이고 이 시간은 어쩌면 찰(刹那)나일지도 모른다. 우주의 시간은 우리 인간이 계산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 우주는 다만 지금이 있을 따름이다. 창조는 전능한 신의 절대적 권능에 의해 이룩되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인간의 사고와 언어능력으로 표현하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자기의 표현 능력으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신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음이다.
유인원이 사람의 조상인 것도 황당하다. 흔히 지능이 발달한 동물을 인간으로 친다면 유인원도 낮은 지능의 인간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하고 각종 조직이 유사하다고 하여서 인간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인간이다. 적어도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찾는데 우리의 혼을 뺀다면 이렇든 유인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는 혼이 담겨있다. 그래서 인간이다.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 어찌 사람뿐이겠는가? 제비는 연장 없이 제 집을 튼튼하게 몇 년을 써도 닳지 않고 허물어지지 않게 짓고, 거미는 사람의 능력으로 잴 수 없는 정확한 간격으로, 체증폭(遞增幅)을 구사하여 짓지 않는가? 벌은 똑같은 크기의 구멍을 탄탄한 재질로 정교하게 만들어서 저들의 세계를 이룩하지 않는가? 인간은 입이나 발이나 밑으로 이런 것들을 만들 수 없어서 손으로 만들뿐이다. 그렇다면 도구를 만듦은 이런 짐승들의 능력에도 못 미치는 초보 단계 아닌가? 기준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잣대가 다르다.
유물사관대로, 사람이 사는 목적을 단순히 먹기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먹는, 의미 없는 인간으로 친다면 차라리 인간이 아니기를 원할 수밖에 없다.
망망대해의 작은 배 안에서 한사람에게 ‘당신은 어디에서 탔습니까? 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 ’글쎄요 어디에서 탔는지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다. 다시 묻는다. ‘그러면 어디로 가시는 지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글쎄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는데요!’라고 또 대답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어서 다시 묻는다. 그런데 왜 이 배에 탔는지는 아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아! 난 왜 탔는지도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다면,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은 그를 무척 불쌍히 여기고 실성했거나 아니면 식충(食蟲)이로 알 것이다.
이 사람이 나라면 난 식충이거나 짐승이다. 왜? 난 실성하지는 않았으니까? 식충으로 돼서 되겠는가! 싶어서 정신이 확 든다. 사람이 아니라 동물에 진배없다. 난 짐승은 아니다.
사람이 물질로 구성됐으니 죽으면 각 본연의 물질로 환원될 뿐이라 하며 혼도 소멸한다고 하면, 그 원소인 물과 인과 철과 단백질과 산소 등등의 빠짐없는 원소를 결합해서 적당한 온도에서 배아로 자라게 해서 인간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렇게는 전혀 불가능한 것은 우리에게 혼령을 넣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난 로봇이 될 순 없다.
우주 만물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지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면 애당초 없는 물질과 그 질량이 어떻게 갑자기 생겨났고 이에 대한 ‘질량 불변의 법칙’은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따져보자! 한 원소가 다른 원소와 융합 또는 이온화(전리; 電離)될 때 그 질량이 변하지 않는데 어떻게 만들어-융합 : 이온 될 수 있는가! 없는 질량이 이룩되는 힘은 무엇인가? 전능하신 존재이다. 그래서 난 믿음이 굳어진다. 옳거니, 말대로 변증법으로 설명되는 이와 같은 생각은 무엇으로 탓하며 아직 알아들을 수 없는 ‘형이상학’이라는 높이 매달린 말을 무엇으로 응대하랴! 해서 난 ‘이동순’ 형에게 구원을 청했다.
머나먼 우주 밖을 헤엄치고 돌아온 기분이다.
며칠이 지난 오늘도, 희망을 잃은 포로들의 천막 속에 따뜻한 햇살이 들어 답답한 사방의 휘장을 말아 올리고 있다.
희망찬 새날 아침이 열린다.
나는 영원한 삶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