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세숫대야
아직도 고향집엔 놋세숫대야가 있다
늙수그레한 어머니처럼 홀로 남아 있다
물을 비우듯 식구들이 차례로 떠나고
시간은 곰삭아 파랗게 녹슬었다
어머니, 볏짚에 잿물 발라 오래도록 문지르면
다시 환하게 밝아오던 그때처럼
추억은 때로 보름달처럼 둥글고 환하다
가만가만 두드리면 잊혀진 목소리들도
끈끈하게 살아서 돌아오니
아, 그래 너는 징소리처럼 기일고
나지막한 울음을 속에다 감추고 있었구나
다시 샘물을 퍼 담고 어푸어푸 세수를 한다
세수를 하다 말고 물속을 들여다본다
순간, 낯설게 흔들리는 내 얼굴이 하나 있고
그 위로 식구들 얼굴이 아련히 얼비친다
아직도 고향집엔 놋세숫대야가 있다
결코 깨지지 않을 황동 신화처럼 숨 쉬고 있다. /김선태
살림살이에 소리가 많은 시절이 있었다. 물 긷는 소리, 쌀 씻는 소리, 밥 먹는 소리까지. 그 다정하고 사무치는 소리들은 다 어디 갔나? 텔레비전 소리가 다 가져갔고 칸막이들이 다 가렸다. 식구들도 이제 사무적인 시대다.
그럼에도 고향에 가면 칸막이를 벗어난 마당 세수를 하고 싶어진다. 거기 놋세숫대야라면 제법 괜찮은 어머니의 혼수품이었으리라. 쟁그랑거리는 여운 속에다 냉수 퍼 담고 잠시 들여다보면 일렁이는 얼굴 속에는 아버지도 있고 큰형님도 있다. 어린 아들도 있다. 거기 아련한 설움 같은 게 없을 리 없다. 떨쳐내듯 푸푸거리며 얼굴을 닦고 맨드라미 흐드러진 마당귀에 물을 세차게 끼얹으면 마음이 후련해졌다.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놋세숫대야'는 어느덧 '신화'가 되어서 농경민 출신의 핏속을 '징소리'처럼 떠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