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下弦)
머언 기별 같은
저물지 않는 이름 같은
외진 간이역의 늦게 핀 백일홍 같은
서늘한 한 줄 묘비명
하늘 난간 흰 하현(下弦). /정혜숙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추석의 풍요로움도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명절 증후군' 등이 지면을 장식하면서부터 빛을 잃었지 싶다. 오랜만에 일가친척 만나고 핏줄이며 묵은 정을 확인하는 귀향의 흐뭇함은 묻히고 스트레스 지수만 도드라지는 것이다.
살기 팍팍한 세상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둥근 보름달 아래 고요히 젖은 동네나 공원을 찾아 걸으면 마음이 조금은 둥글어진다. 월광욕으로 정서적 치유를 해보는 것, 그것도 가을 달밤엔 꼭 누려볼 은은한 여유다.
그 둥글던 한가위 달도 어느덧 하현이다. 하현은 왠지 마음을 더 서늘케 한다. '머언 기별' 같아서일까, '저물지 않는 이름'을 떠올려주기 때문일까, 아련한 무언가가 가슴을 저민다. 그렇듯 소슬히 걸려 있는 하현에서 '외진 간이역의 늦게 핀 백일홍'이라도 겹친다면 한결 더 그러하리. 더욱이 '서늘한 한 줄 묘비명'의 비수를 꽂는다면, 말없이 고개 숙여야 하리. 수많은 시를 낳은 달, 여기 하현에 와서는 더할 나위 없이 애잔하니…. /정수자 시조시인/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