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나키스트여
누가 또 먼 길 떠날 채비하는가 보다.
들녘에 옷깃 여밀 바람 솔기 풀어놓고
연습이 필요했던 삶도 다 놓아 버리고
내 수의(壽衣)엔 기필코 주머니를 달 것이다.
빈손이 허전하면 거기 깊이 찔러 넣고
조금은 거드름 피우며 느릿느릿 가리라.
일회용 아닌 여정이 가당키나 하든가
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
내 사랑 아나키스트여 부디 홀로 가시라
/박시교
떠나는 것들로 스산한 때다. 낙엽에 수척해진 물소리까지 쓸쓸한 그늘을 끼치며 간다. 그 모두를 큰 하구(河口)로 실어낼 듯 바람이 구석구석 높다. 빈 들판 빈손의 나날, 아나키스트가 그러할까. 무릇 시인이 꿈꾸는 정신의 고처(高處), 아무 데도 들지 않고 아무것도 받들지 않고 세계 속에 홀로 선다는 것은 어쩌면 오래된 미래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머니를 안 다는 수의(壽衣)에 기필코 주머니를 달겠다니 어인 짐짓 투정이신가. 빈손만 찔러 넣지는 않을 듯싶은 그 주머니 속이 문득 궁금하다. 아무려나 '천지에 꽃 피고 지는 것도 순간의 탄식'일 뿐이니, '내 사랑 아나키스트'는 부디 홀로 가시랄 밖에―. /정수자·시조시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