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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무학대사


 

 

   인연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나면 학업을 통해서, 사업을 통해서 사부(師傅)나, 지혜 있는 분들로부터 자문과 교훈을 많이 들어야 성공의 첩경이 될 수 있다. 또 서책을 통해서 1천년의 인간이 겪은 지혜를 원용하여 오늘에 지혜롭게 살 수 있다. 도선국사로부터 자문, 교훈을 얻어 고려국을 건국한 고려국의 태조 왕건의 이야기와, 무학대사의 자문과 교훈을 받아 이조(李朝) 왕가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성공담 같은 사례는 한국과 중국, 일본, 삼국(三國)의 역사에 교훈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다.

 

   삼국의 사례를 보면, 한 결 같이 고승으로부터 개국의 창업자는 자문과 교훈을 비밀리에 받았고, 민심수람을 위한 비책과 관세음보살전에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였다.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무학대사와 이조의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이야기만을 소개한다.

 

   이성계가 젊은 무장(武將)으로 활약할 때, 어느 날 밤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무너져가는 큰 기와집에 들어갔는데, 그 큰 기와집이 워낙 낡아서 붕괴 직전이었다. 이성계는 붕괴가 불안하여 큰 기와집집에서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등에 석가래 셋을 가로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이성계는 흉조(凶兆)인지, 길조(吉兆)인지 스스로 알 수가 없어 다음날 근처의 유명하다는 여무(女巫)를 찾기로 하였다.

 

   유명한 여무(女巫)는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듣고는 강신(降神)하여 신의 해몽에 대한 신탁(神託)을 알고자 방울을 흔들며 신전에 노력했으나 이상하게도 강신이 되지 않았다. 여무는 정색하여 이성계에게 자신은 도저히 그 꿈 해몽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가까운 설봉산 토굴에 한 고승이 혼자 수행하고 있으니 찾아가면 해몽을 들을 수 있다고 권하였다.

 

   이성계는 혼자 토굴의 고승을 찾아가 예를 갖추고 대면했다. 그 고승이 바로 무학대사였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오기 전에 이미 올 것을 전조(前兆)를 통해 알고 있었고, 이성계의 관상을 살핀 후, 꿈 이야기를 들은 무학대사는 금방 의미를 깨닫고 이성계에게 누가 엿들을 것을 두려워하는 듯 나직히 말했다.

 

   “낡아 붕괴되는 큰 기와집은 망해가는 고려국(高麗國)을 의미하는 것이요, 그 집에서 나오면서 등에 석가래 셋을 짊어지고 나왔다는 것은 왕(王)을 의미하는 것이니, 장군은 장차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는 천기를 미리 깨닫게 해주는 길몸입니다. 차후 어느 누구에게도 두 번 다시 그 꿈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날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재삼 꿈 이야기를 두 번 다시 해서 천기(天機)를 누설하여 대업을 스스로 망치는 입조심을 강조하며, 첫째, 백성의 민심은 물론, 수하 장병들과 여타 장병들까지 민심을 얻는 노력을 기울이라 했고, 둘째, 신불(神佛)전에 남몰래 기도하여 가호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날,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서로의 손을 힘차게 잡았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자문대로 첫째, 백성과 장병들의 민심을 얻는데 진력하고, 둘째, 금산(錦山)을 비롯한 명산에서 남몰래 산기도를 드리고, 석왕사(釋王寺)에서 기도를 드렸다. 특히 신분을 승려들에까지 숨기고 관세음보살전에 간절히 기도하고, 명상, 즉 속마음으로 소원성취의 축원을 드렸다 전한다.

 

   이성계장군과 무학대사는 친구와 같이 다정하게 지내면서 단둘이서 막걸리 즉 곡차(穀茶)를 마시면서 국운이 쇠진해가는 고려에 대해 우국(憂國) 우민(憂民)과 또 백성의 태평성세에 대해 범새워 토론하였다. 무학대사는 평소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부운(浮雲)처럼 혼자 전국을 돌아다니는지 자취를 감추 다가 때가 되면 가끔씩 이성계장군을 찾았다. 대업의 때를 은밀히 묻는 이성계장군에게 무학대사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으니 부지런히 민심을 얻는 일을 많이 하고, 관세음보살전에 기도할 것”만 강조하였다.

 

   마침내 이성계가 고려의 대병력을 지휘하는 때가 도래했다. 당시 고려국의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지위에 있는 최영장군이 이성계장군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대병력을 내줄 터이니 망해가는 원(元)나라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새롭게 요원의 들불처럼 일어나는 명(明)나라를 토벌하라는 군령을 내린 것이다. 이성계는 황급히 무학대사를 찾아 자문을 얻고자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행방 묘연한 무학대사에 대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이성계는 병력을 이끌고 중국 땅으로 진격하는 변경지역인 '위화도'에 진을 쳤다.

 

   드디어 최영장군의 특사가 군대를 지휘하여 즉시 명나라를 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성계가 출병직전의 밤, 칠흙같은 밤, 은밀히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장막을 찾았다. 그동안 무학대사는 중국 땅에 건너가 원(元)나라가 끝나고, 새로운 명(明) 나라가 중국 대륙을 거의 장악한 것을 직접 목도하고 황급히 귀국하는 길이었다. 무학대사는 엄숙히 이성계에게 明을 공격하는 출병에 대한 부당성을 세 가지를 들어 강조했다.

 

   첫째, 고려를 속방으로 공녀(貢女), 공물(貢物) 등으로 괴롭히든 원(元)은 明의 군대에 쫓겨 거의 멸망한 탓에 출병해서 元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 한족(漢族)이 주도하는 새나라를 희망하는 기세등등한 백만이 넘는 명군(明軍)을 몇 만의 고려군이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도저히 승산이 없고 출병한 고려군은 다시는 고향에 부모형제와 처자를 볼 수 없이 몰살당하는 것은 물론 그 시체는 대륙에 버려지고, 영혼은 주인 없는 고혼이 된다는 것이다.

   셋째, 元을 멸망시킨 明軍은 복수를 위해 고려를 침공하면, 고려군은 물론이요, 무고한 고려의 백성은 집단살해를 당하는 살겁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고려의 왕과 최영을 위시한 고려조정의 실력자들은 왜 승산없는 전쟁으로 고려군을 출병하는 것인가에 대한 혜안의 논평을 무학대사에게 구했다.

 

   무학대사는 거침없이 답하였다.

   첫째, 망해가는 고려국이기 때문에 판단이 흐려 망해가는 元을 구하려는 것이고,

   둘째, 최영을 위시한 실력자들이 민심을 얻는 이성계를 시기하고 미워해서 따르는 장병들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지(死地)로 보내는 것이 음모일 뿐이라고 말해주었다. 무학대사는 외치듯 말했다. “망해가는 元을 구하기 위해 장군을 따르는 장병들은 물론, 무고한 고려 백성을 몰살당하는 출병을 하실 것이오? 이제 고려국의 국운은 끝났습니다. 이제 장군은 망한 元을 위해 죽어야 하는 장병들과 함께 살아서, 백성이 원하는 새나라를 건국하시는 때가 온 거요.”

 

   또, 무학대사는 중국 땅에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고,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는 때이기 때문에 이 땅에 원(元)과 함께 망하는 고려국을 망하게 하고, 새나라를 세우는 것은, 새로운 중국의 명황제(명황제)가 시비하지 않고 오히려 승인과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자문해주었다.

 

   다음날 이성계는 장병들에게 “망한 元을 위해 우리장병이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조의 선동연설을 하였다. 또 고려군의 출병이 결국 장병들은 몰사하고, 명나라의 보복전쟁으로 고려국의 백성이 몰사한다는 것을 연설했다. 특히 중국 땅에 출병하면, 살아서는 고향의 부모형제, 처자를 살아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연설했다.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을 깨달은 고려군은 하늘이 떠나가라 분노의 함성을 내지르며 자신들을 죽이려는 최영을 타도하기 위해 회군(回軍)하자는 성난 군심(軍心)으로 돌변해 버렸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건국을 위해 중국이 원(元)나라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 명(明)으로 바뀌는 중국정치를 절묘하게 이용하였다. 또 무학대사는 고려인들의 대다수 민심이 元과 함께 망해가는 고려국에 대한 희망을 접은 지 오래라는 것을 환히 알고 있었다. 중국 백성이 明을 선택하듯이 고려국의 백성은 이제 새나라를 원한다는 것을 전국을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다니면서 통찰한 것이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천명(天命)의 이씨 조선의 개국의 단초를 열었다.

 

   중국 땅에서 원(元)나라를 멸망시킨 새로운 제국 명(明)의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누구인가? 주원장은 중국 역사에 탁발 승려가 황제가 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어릴 때, 황각사(皇覺寺)에 출가위승한 법명이 법해(法海)라는 승려였다. 법해는 황각사의 경제가 어려워 탁발을 다니다가 24세에 미륵불의 재림이 왔다고 선전하는 미륵교도들 일명 원나라에서는 홍건적(紅巾賊)이라 부르는 민중의 군대에 졸병으로 투신했다. 법해는 주원장(朱元璋)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혜와 용기가 출중하여 언제나 전투에 앞장 서는 상승장군(常勝將軍)이었다. 주원장은 44세에 명(明)의 황제위에 올랐다. 주원장 역시 열렬히 관음기도를 하는 황제였다.

 

   전해오는 항설(巷說)에 의하면, 주원장은 황제가 되었지만, 두 가지 근심이 있었다. 첫째, 출신이 탁발승려였기에 군심(軍心)과 민심이 비웃고 조롱하는 것이요, 둘째, 몽고로 패주한 원(元)이 고려국 같은 속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다시 중원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크게 근심하였다.

 

   주원장은 자신이 승려 출신이었기에 승려들을 황궁에 초대하여 거하게 대접하고 황금을 불사에 쓰라고 나눠주면서 자신이 같은 승려 출신이었음을 상기시키며, 나이로 따져 사형사제로 불렀다 한다. 주원장은 황궁에서 대접받고 황금까지 받아 만족해하는 승려들의 귀에 이렇게 부탁했다. “자신은 운수 좋은 승려출신 황제”가 아니라, 하늘이 낸 진명천자(眞命天子)라는 것을 중국 전역에 홍보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주원장이 황궁으로 전국 고승들을 초대하여 대접할 때, 승려들의 무리속에 무학대사가 끼어 있었다고 한다. 무학대사는 유창한 중국어로 황제의 근심인 망한 원(元)나라의 군대가 고려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명(明)을 침공하는 일을 막아주겠다고 말했다. 조건으로 중국에도 새로운 제국을 개국 했듯이, 고려 땅에 새 나라를 개국해야 할 터이니 이를 무조건 승인 해주고 지원해줄 것을 청했다.

 

   주원장은 주위를 긴급히 물리치고, 무학대사의 손을 잡고서는 “사제는 나의 근심을 꿰뚫어보는 혜안이 있구먼. 사실 나도 사제처럼 운수납자로 살아야 하는데, 머리를 기르고 황제 노릇을 하고 있으니…. 늘 부처님께 송구한 마음이지…. 그러나 내가 원(元)을 타도하고, 명(明)을 개국하고, 사제가 고려에 새 나라를 개국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은 하늘과 제불보살의 뜻이야. 우리가 어찌 하늘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그런데 고려에 개국할 큰 인물은 있는가? 반드시 원(元)의 편에 서지 않게 막아야 하네. 알겠지?”

 

    명 태조 주원장은 임종 때까지 관음기도를 했다. 그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타인 출입엄금의 방에 자신이 예전에 탁발 다닐 때의 낡아 헤어진 삿갓, 더덕더덕 누빈 헌 승복, 낡고 때 묻은 걸망을 놓아두고, 가끔씩 혼자 방안에 들어가 만지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관세음보살님께 감사하며 소리없이 울었다 한다.

 

   무학대사의 자문대로 이성계는 이조(李朝)를 개국했고, 명(明)나라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새로운 나라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해주고 또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무학대사가 이성계 앞에 나타난 것은 태종 이방원이 이성계가 작은 부인 강(姜)씨 부인의 아들을 왕위 후계자로 정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강씨 부인의 아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는 소위 왕자의 난(亂)을 일으킨 후이다.

 

   이성계는 두 사람에게 자문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무학대사와 정도전(鄭道傳)이었다. 무학대사는 중국의 유방(劉邦)이 한(漢)제국을 창업하도록 결정적으로 도와주고 홀연히 산으로 사라진 장량(張良)같은 처신을 하여 이성계에게 부귀를 원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자신이 중심이 되는 재상정치를 탐하고, 이성계의 본부인 아들인 태종 편에 서지 않고, 이성계의 둘째 부인 강(姜)씨의 소생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정치 공작을 펼치다가 태종 이방원에게 쫓겨 자신의 집 마루 밑에 숨었다가 붙잡혀 참수 당하는 불행을 당했다.

 

   부귀의 욕망에 의한 잘못된 판단에 정도전은 참수 당했지만, 무학대사는 초연히 이 산 저 산으로 유유자적하는 인생을 살았으니 그것은 부귀를 탐하지 않은 원인이다.

 

   이성계는 작은 댁 강씨 부인의 아들을 모조리 살해한 태종에 대해서 노기충천하여 한양을 떠나 함흥에 머물면서 태종을 죽이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다. 태종은 태조인 아버지를 함흥에서 대궐로 모셔오기 위해 사자를 보냈다. 성난 이성계는 찾아오는 태종의 사자를 번번히 화살로 쏘아 죽이는 것을 반복했다. 그것을 돌아오지 않는 사자라는 뜻에서 '함흥차사(咸興差使)'라 칭한다.

 

   이성계가 태종의 사자로서 자신을 설득하려 오는 함흥차사를 화살로 쏘아 죽이는 것을 반복할 때, 어느 날, 홀연히 무학대사가 이성계 앞에 나타났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화살을 쏠 수는 없었다. 그날, 무학대사는 꾸짖듯 이렇게 이성계를 깨우쳤다. "이씨 조선이 오백년을 가는 천운인데, 대왕이 천운을 망치고 있습니다. 정말 강씨부인을 위해 천운을 망칠 거요?" 무학대사는 또 이렇게 꾸짖듯 말했다.

 

   “이제 대왕은 정치를 방하착(放下着)할 때가 되었지 않습니까? 장수(將帥)로 있을 때, 왕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명을 칼과 화살로 죽였습니까? 그것이 모두 악업인데, 또 함흥차사를 화살로 쏘아 죽여 악업을 짓습니까? 곧 저승사자가 찾아올 터인데, 생전에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전에 대왕이 죽인 사람들의 영혼 천도제를 지내면서 남은 여생을 살아야 양심이 있는 불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즉시 사람 죽이는 일을 중지하시고, 한양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말에 크게 깨달았다.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며 함께 잠에 들었다. 이성계가 눈을 떠보니 무학대사는 홀연히 사라지고 몇 자의 경책(警策)의 글이 남겨 있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경책(警策)대로 태종을 후계자 왕으로 정식 인정하고, 자신은 회암사 등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그동안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영혼천도를 위해 관세음보살 전에 기도하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 관세음보살 전에 기도하다가 목숨을 마치는 순간을 맞았다.

 

   이성계는 죽음을 앞두고 무학대사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찾았다. 그러나 무학대사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진정 명리(名利)를 떠난 무학대사는 하늘의 뜻이 이씨 조선을 원하고, 그 기간은 5백년이 간다는 것을 알고 이성계를 인도해주고, 소임을 다한 듯, 사라졌다. 그는 천명의 전달자였다. 무학대사는, 어느 산 토굴에서 홀로 “나무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을 부르는 기도를 하다가 입적했을 것이라는 풍문만 무성할 뿐, 한양의 거리, 시골 어디서고 무학대사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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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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