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모두가 선점하고 누리는 쪽에서 보는 시각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도 후세의 사람들은 어느 곳이건 어느 때건 가리지 않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하기야 태어난 아기나 발견된 사물은 처음 이름 지은 이가 부른 대로일 터이니 탓할 일은 못 되나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것도 많다.
그까짓 동식물의 이름이나 사람의 이름은 고사하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지구촌 만해도 그렇다. 두말할 것 없이 동은 해 뜨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경도의 시점은 동이 아니라 서쪽이다. 영국 런던이다. 모순덩어리다. 당연히 현재의 180도 위치가 0도이라야만 해 뜨는 동쪽인 줄, 생각과 느낌과 이치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더 씹어서 맛을 보자면 해가 뜨는 동쪽을 0도로 하여서 서쪽으로 점점 넘어가서 180도가 아니라 360도가 돼서 일부변경(日附變更)이 돼야 할 터인데, 이게 아니다. 지금대로라면 동경도 동쪽이 있고 서경도 동쪽이 있는 꼴이다. 그것도 숫자를 거꾸로 붙여서 만든 경도로 말이다. 우리가 부르는 남(南)은 남이 아니라 중(中)이다. 이것도 북반부에서 일어난 문화의 소산일 테고, 지금은 따뜻한 남쪽으로 가려면 남쪽이 아니라 중 쪽으로 가야만 한다.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오히려 춥기 때문이다. ‘따뜻한 남쪽 나라…’, ‘남쪽 나라 십자성…’, 이 또한 북반구에서 사는 사람의 독선적 시구(詩句)다. 남반구 사람은 ‘따뜻한 북쪽 나라…, 북쪽 나라 북극성…’해야 정서에 맞을 터인데 이런 가사가 북반구에서 과연 먹혀들겠는지 모르겠다.
씨도 안 먹힐 소리를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고향이 남쪽의 따스한 훈기가 그리워서 끊임없이 남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류 본연의 원초적 소질이 담겨있다고 보아서 마땅하다. 또한 지난 반세기 전에 기회만 있으면 남쪽으로 잠행하든 고향 친지들의 고향 노래를 대신 읊고 싶기 때문이다.
그때의 남쪽 땅 한국은 ‘이남’, 즉 38도 이남의 준말이다. 이남은 무엇이든 간섭하지 않고 개인의 재산과 자유가 보장되는 천국이란 것이다. 수군거리느니 이남 이야기고 이남으로 넘어가는 사람만이 인간 구실을 하는 것같이 (38)‘이남’ 행으로 모두가 들떠 있다. 마치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의 서행 물결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낮엔 아무 일 없이 평온하고 이북을 다스리는 당의 기치만 마을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야행성 남행(南行)은 되도록 남몰래, 되도록 빨리, 되도록 많은 가족이, 38선 넘어가기를 꾀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이는 모두가 ‘이남’엘 간 것 같고, 남아있는 우리는 점점 외로워지는 것 같았다.
이 마음은 나의 친구들을 겨냥해서 우러나는 나의 고독감이다. 외떨어지고 따돌리기라도 된 듯이 허전했다. 우리 집의 형편은 미동도 해서는 안 될 집, 누대(累代)를 이은 뿌리박은 집안의 종손이니 선영(先塋)을 팽개치고 남부여대(男負女戴)할 수 없어서, 눈도 깜박이지 않고 온 식구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우리가 집을 뜨기에는 너무 무겁고 뿌리가 깊어 박혀있었다.
난 우여곡절 끝에 남행의 기화로 이날까지 숨은 쉬고 살았지만 뜻을 펴고 살지는 못한, 되새김하는 마당에 이미 내 선망의 대상이었든 그들, 선각자(?)들은 더러는 유명을 달리했고 아직 생사를 모르는 친구들은 불러도 대답이 없다. 하루속히 찾고픈 마음만 간절할 뿐 운신하지 못한다.
아직은 내 기백이 살아있어서 그들을 맞이하여 그때 내가 외로웠든 심경을 토로하며 지난 이야기로 몇 밤을 새운들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건만 이들의 생사는 묘연하고 내 백색의 머리는 오히려 검은 머리 뿌리가 촘촘하다. 남행이라 했으니, 이들을 남극점까지 가야 찾으려나 보다. 아무려나 그쪽이 남쪽이니까.
영국 사람들이 지구를 토막 내 부르는 이름과 미국 사람들이 서부를 개척하면서 붙인 이름과 내가 철들면서 부르며 이름을 붙인 ‘이남’이 동질이라서 나도 할 말을 주워 담을 수밖에 없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