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고무

외통프리즘 2008. 6. 18.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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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고무

1591.010126 생고무

멋도 모르고 껑충거리던 해방 후, 벌어지는 일들이란 어린 내가 봐도 주인 없는 살림 같았다.

 

어디서 무엇이 터져 나왔다하면 이건 봇물 터지듯이 넘치고 또 언제 그런 것이 있었느냐는 듯이 깡그리 씨가 마르곤 했다.

 

목재가 그러했고 연료가 그랬으며 양식이 그랬다. 오늘만 살고 말 사람들 처럼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퍼 내 왔다. 넘치는 해방감을 저마다 만끽했다.

 

어느 날부터 손에 쥐기만 해도 척척 휘어지는 보드라운 고무제품의 신발이 선보이기 시작하더니 옹기그릇 만들어 나오듯이 갖가지 모양의 신발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날이 갈수록 화려하고 다양하다.

 

장바닥엔 생고무-고무원료- 신발이 너친다. 집집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제 것을 몇 켤레씩 장만하는데, 이건 신발이 아니다. 기름 바른 발바닥처럼 이리 놀고 저리 휘둘리고, 신발이 발바닥에 붙어있질 않고 신 따로 발 따로 논다.  그래도 발가락이 아프거나 신발이 꿰지거나 하는 일은 아예 없다. 한없이 늘어나는 양질의 생고무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가죽모양으로 얇게 가공한 것을 가위로 오려서 고무풀로 부치면 되는 것이니 얼마나 쉬웠을까싶지만 그 하나하나를 손으로 만들었으니 정성은 들였다고 할만하다. 나오는 것마다 한결같질 않다. 짝마다 각각이고 켤레마다 다르니 가히 작품의 전시장인 것이다. 장화도 나오고 장갑도 나오고 생고무 홍수다. 어린이 신발은 물론이고 장난감, 길길이 튀기는 속이 찬 공, 우리들 학용품의 지우개, 이루 헤아릴 수없이 많은 생활용품이 생고무로 이루어졌다.

 

공은 키를 넘게 퉁기지만 그 보드라운 고무의 면을 고르게 하지 못 한 탓으로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제멋대로 공이다. 하지만 탄력은 있어서 우리의 상상을 넘는 튀어 오름에 어쩔 줄 모르는, 공대로의 공이니 이 공을 가지고 놀면 럭비공 같아서 오히려 그 맛을 더했다. 잘 차는 애도 소용없고 못 차는 애도 상관없다.

 

지금 이런 공이 있다면 재미나는 놀이가 많이 만들어질 것 같다.

 

이 생고무 신발은 닳지 않으니 신는 맛이 안 난다. 이거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신은 신어서 닳고 떨어지고 새것으로 갈아 신는 멋과 맛이 있으련만 이것은 한번 신으면 해지거나 떨어지질 않고 사람이 닳거나 떨어져야 할 판이니 진력이 나고, 참지 못하는 우리들은 멀쩡한 신을 그냥 벗어서 던져버리곤 했다.  그러다가 슬슬 고물수집상이 엿을 준다며 이 생고무 신을 수집하니 우리의 구미와 영합할 수밖에 없다.

 

식자거나 무식자거나 앞날을 점치는 이는 없다. 엿장수 가위소리는 하루 종일 온 동네를 짤그랑거리며 누비더니 이젠 몇 사람씩 패거리로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수집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 눈치를 채지 못했다. 엿 한가락에 신한 짝, 며칠이 지나니까 이번에는 저울에 달아서 얼마, 또 얼마가 자나니까 이번에는 달아서 돈도 주고 물건도 주고 횡재라 싶었는데, 이미 지천이든 생고무신발은 우리 곁을 다 떠나고 만 뒤였다.

 

고무 값은 다락같이 오르고 수집가들은 혈안이 돼서 온갖 술수를 다 쓰며 돌아다닌다. 그러니까 고무의 순도가 가장 높은 일차가공품을 그대로 녹여 잘라 쓰고 낭비하다가 이것이 바닥나니까 이제는 부랴부랴 다시 모아들이는, 한 치 앞을 가늠하지 않는 우리 모두는 하루살이 살림이었다.

이것이 내가 본 혼란기의 우리 의식구조였다. /외통-

지갑 속에 넣은 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꺼낼 것이 없다.(T.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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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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